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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는 언제부터 용이 나지 않았을까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예전부터 잘 나지 않았습니다.


일단 21세기에는 확실히 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기사통합검색서비스(KINDS)에서 "개천에서 용"을 기준으로 찾아보면 전남 구례고 교사(였던) 박명섭 씨가 2003년 '한겨레'에 보낸 글에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 '부모 잘 만나면 용 난다'는 말로 대체되고 말았다"고 쓴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13년 전부터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한탄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그럼 21세기로 가 볼까요? 이제부터는 옛날 신문 기사를 찾도록 도와주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물론 신문 기사가 언어 사용을 100%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감자탕이나 닭도리탕 때도 쓴 것처럼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은 기사로 남게 마련입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 기사를 찾아 보면 분명 '금수저', '흙수저', '헬조선' 같은 키워드가 갑자기 늘어날 테니까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개천에서 용"을 찾아 보면 1998년 한겨레 연재 소설 '아이엠에프 인생'에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내 생각으룬 우리 같은 놈들이야 평생 가야 그게 그거일 것 같은데, 개천에서 용 나는 것도 옛말이지.


다만 이때는 때가 때이니만큼 일단 패스. 소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외환위기 때문에 희망이라는 걸 찾기 어려운 시대였으니까요. 


계속해서 1980년대로 가보겠습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1931~2011)은 1983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에세이 '세정춘추'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 여자가 중매를 좋아했던 것은 (중략) 개천에서 용난 것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좋은 학교 나오고 좋은 직장 가진 건강한 청년을 보면 넉넉하고 가문 좋은 집안에서 구김살없이 자란 처녀와 맺어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 못 말릴 버릇 때문이었는데 요샌 그게 전혀 안 통한다는 거였다.


이 구절만으로 당시가 개천에서 용 되기 힘든 세상이었는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개룡남'은 그때도 지금처럼 결혼 시장에서 인기가 없었다는 사실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1970년대로 가보면 당시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가 두 가지 뉘앙스로 쓰이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뜻. 또 한 가지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1970년 동아일보 '횡설수설'을 읽어 보겠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온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아마 조(오련) 선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중략)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그가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지 불과 1년 남짓해 우리 민족을 위해 이처럼 눈부신 기록을 세웠다.


그러니까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조오련이 수영 선수로 대성한 걸 두고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표현한 겁니다. 


1960년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1965년 횡설수설입니다. 


그까짓 대중과 거리가 먼 비싼 좌석버스의 운행쯤은 빛 좋은 개살구다. 그것으로 살인 버스가 하루 아침에 개과천선 되리라는 것은 개천에서 용 나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름 없다.


1962년 동아일보는 대만 문학자 후스(胡適) 박사 타계 소식을 알리면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지리학자인 아버지와 일자무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후 박사라 확실히 개천에서 태어난 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이럴 때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콩 심은 데 콩 난다'하고 반대 뉘앙스에 가깝습니다. 어머니는 몰라도 아버지가 지리학자인데 본인은 문학을 전공한 걸 지적하는 얘기니까요. 


1957년 지면에도 이 속담은 1962년하고 비슷한 의미로 등장합니다. 경향신문 연재 소설 '주유천하'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고 진흙 속에서 꽃이 핀다는 말대로 장쇠는 그 아비와는 달라서 퍽으나 보동되고(kini註 - 키가 작고 통통하다) 옹골차 보이는 소년"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


이럴 때 이 속담은 '어려운 집안에서 성공하다'는 뜻과는 큰 관계가 없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이 말을 지금하고는 조금 다른 용법으로 써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던 겁니다.


동아일보에 이 속담이 처음 등장한 건 1925년 6월 13일자였습니다. 이 기사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척박한 환경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뉘앙스입니다. 꼭 어려운 집안뿐 아니라 사회적 밑바탕까지 외연을 넓힌 것. 말하자면 조오련 같은 케이스입니다.


이 기사를 쓴 인물은 평론가 자격을 논하면서  "'개천에서 용났다'는 골계적황화(滑稽的謊話)" 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골계적황화를 요즘 말로 바꾸면 '웃기는 거짓말'이 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옛날은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라고 믿는 걸까요? 저는 '옛날이 좋았다'고 믿는 게 인간 본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제가 예전에 쓴 기사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동화작가 김영희 선생님은 1979년 10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우리는 그전보다 훨씬 잘살고 있다고 하는데 운동회는 왜 이리 가난해졌을까. 6·25의 피란살이를 치른 가난했던 옛 부모들도 거대하고 찬란한 운동회를 만들었다. 무엇이, 그 무엇이 꿈의 운동회를 날개 순이 생기지도 못하고 쪼글쪼글 마르게 했을까"라고 썼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모든 게 해결됐을까요. 1974년 12월 23일자 경향신문은 "세계 어느 나라든 고졸 정도가 알맞은 직업인 스튜어디스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학사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형편이고 대졸 경찰, 9급 공무원, 운전사도 흔하게 (됐다)"라며 "대졸자들조차 취업의 길이 막연한 상태에서 미처 고졸자까지 사회나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이 지금의 실태다. 오늘의 사회적 모순을 내일에까지 연장시키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범하지 말아야겠다"고 당부했답니다.


대학 등록금에 대한 부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1965년 2월 6일자 동아일보 횡설수설은 "갈수록 격심해가는 입학난과 등록금 과중은 우리나라의 가장 '부끄러운 자랑거리'가 돼 있다. 그 때문에 해마다 얼마나 많은 비극이 일어나는가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중대한 사회문제"라며 "이 땅에서 생(生)을 받은 것이 불행하다고 탄식의 눈물을 흘리는 어버이까지도 생기는 현상"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머릿속 기억과 신문 속 기록이 이렇게 차이 나는 건 똑같은 시간을 아이와 어른으로 동시에 살아볼 수 없어서가 아닐까요. 아무리 철이 일찍 든 아이라고 해도 한 번에 전셋돈을 몇억 원씩 올려줘야 하는 생활의 무게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옛날이 아니라 자기가 어리고 젊을 때가 좋았던 거겠죠.


그러니 '흙수저' 학부모 여러분 자녀에게 너무 미안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개천에서 용이 나고 있을 테고 언젠가 그게 여러분 자녀가 될지 모릅니다. 개천에서 자꾸자꾸 용이 났으면 처음부터 저런 속담 자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몇몇 어르신 여러분도 "요즘 젊은이들은 '노오력'이 부족하다"고 나무라기 전에 한 번만 더 참아주세요. 여러분도 젊은 시절 충분히 한탄하셨습니다. 걱정되어서 하시는 말씀인 줄 모르겠지만 젊은이들 눈에는 나이 먹다가 체한 어르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Last but not least, 젊은이 여러분께는 그저 "힘 드시죠?" 젖먹던 힘까지 짜내고 있다는 걸 알기에 '힘 내라'는 말씀은 감히 못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희망이라는 모르핀에 잔뜩 취하는 것밖에 답이 없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은 아직 우리가 살지 않은 날들(빅토르 위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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