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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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보 좀 안 쓰시면 안 될까요?

"저기요, 그 스트로보 좀 안 쓰시면 안 될까요?"

어젯밤 친구 녀석과 방배역에 있는 한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계속 눈이 따갑더라구요. 그래서 봤더니 대각선쪽 테이블에 계신 남자분께서 연신 셔터를 누르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무슨 대학 선후배 모임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처음에는 몇 장 찍다가 말겠지, 하고 넘어갔는데 거의 1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셔터질(?)을 멈추시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가까이 가서 '조심스레' 부탁드렸습니다. "죄송한데요, 눈이 좀 피곤해서 그런데. 스트로보 좀 안 쓰시면 안 될까요?"

카메라 주인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오히려 주위 분들이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사실 유심히 관찰해 봤는데 그 분들도 그리 사진에 찍히는 일 자체를 유쾌하게 생각하시지 않는 분위기인 것 같았습니다.

결국 그분은 50.4 렌즈를 챙겨서 호프 밖으로 나가시더군요. 주위 분들의 만류도 뿌리친 채. 그러면서 싸늘하게 저를 한번 쳐다보고 나가셨습니다. 한판 붙자는 거였을까요? -_-)a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트로보만 터뜨리지 말아달라는 건데, 그게 자리를 떠나게 만들 만큼 무례한 부탁이었을지 -_-);;;

저도 어릴 적부터 온갖 이상한 카메라를 장난감 삼아 놀았고, 지금도 DSLR을 한 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도 더러 사진 찍기 싫어 죽겠다는 사람한테 렌즈를 들이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도대체 내가 이걸 찍는 이유가 무엇일까, 말입니다.

사실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음식 사진 찍어 올리시는 분들을 보고 '오바'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별로 없습니다. 그저 그분들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리고 누가 어떤 장면을 어떤 이유로 기록하고 싶든 그건 순전히 그분의 '자유'라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야구장에서 사진을 찍게 되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생각이 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정작 찍고 싶은 장면이 찍힌 사진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준이가 멋있게 다이빙 캐치를 합니다. 준호옹이 나이를 잊은 채 홈플레이트에서 슬라이딩. 그러나 장비를 탓하기에 앞서, 저의 렌즈는 그곳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부터 흥분해서 그 순간을 '즐기느라' 미처 사진 찍을 생각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게 직업이라면 큰 일 날 소리겠지만, 어차피 즐기기 위해 찍는 사진이라면 굳이 그런 순간을 포착하지 못한대도 아무 상관없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사진을 찍는' 즐거움보다 그 순간에 '참여하는' 즐거움이 제게는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사람들을 만날 땐 DSRL은 물론이거니와 컴팩트 디카도 잘 안 가지고 다닙니다. 어차피 사진에 찍히는 것도 싫어하는 까닭이지만, 기본적으로 '참여하는' 혹은 ‘함께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께 여쭤보고 싶었나 봅니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아무런 참가 의의가 없는 모임에서, 왜 스트로보까지 동원해 '기록‘에 매달리고 있었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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