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ess_time 2010. 7. 18. 22:50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벤취에 비유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보자면 내 인생은 수많은 낙서로 얼룩진 채로 할렘가 어느 어두운 구석쯤에 이젠 제 구실을 잃어버리고 기껏해야 쓰레기 투기장 노릇이나 하며 앉아있는 아주 더러운 벤취쯤이 될 것 같다.
그런데도 스스로 그것을 밝은 곳으로 끄집어 내어 깨끗이 닦고, 페인트 칠도 새로 하고 하지 않은 까닭은 가끔씩 더러운 냄새를 맡으며 비뚤비뚤 씌어진 낙서를 읽어 나가는 재미도 그리 기분 나쁜 일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만이 나도 한 때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던 벤취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구실을 아직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오늘, 모처럼 쓰레기 몇 덩어리를 치우고 나서 천천히 낙서들을 다시 읽어 내려 갔다. 그리고는, 모처럼 그 벤취에 다시 앉아 보았다.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지난 해 1년을 함께 해 주던, 조금은 지긋지긋한 공간, 고 3때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말한다, 자신이 어릴 적 꿈꿔오던 것과 실제 세상은 너무도 판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는 내가 어릴 적 알고 싶던 세상의 모습 그대로가 내게 불쑥 찾아와 주었다. 조금은 야위었고, 조금은 썩은 내도 풍겼으며, 그렇기에 더더욱 덜썩 안아 주고픈 모습으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픽 하고 쓰러짐과 동시에 내게 안겨 버리고 말 모습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내 벤취위에 드러누워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역시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위엔 이미 너무 너저분한 쓰레기들이 많이 버려져 있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꿈꾸던 내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의 내가 스스로 그 벤취가 되어 그 자리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이젠 너무도 익숙해져서 나란 놈은 처음부터 그런 벤취이기라도 했다는 듯이, 난 쓰레기들과 사이좋게 내 낙서에 대해 키득이며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낙서들은 제각기 하나씩의 형용사를 지니고 산다. 가난한 바램과 서툰 그리움이 결혼해 뒤늦은 옭아맴을 낳았고 다시 그것은 못난 저주가 되어 너무도 선명하게 벤취에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다, 마치 그 무엇으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을 태세로 말이다.
내게 내려진 못난 저주, 스스로에게 걸어버린 저주는 꿈 속에서 날 찾아와 묻는다, 넌 사랑을 할 줄이나 아는 거냐고, 하지만 언제나 공허한 외침일 뿐, 내 나이보다 더 오래된 노랫말만이 내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사랑이 별 거더냐, 정이 들면 사랑이지.
이제 겨우 스무 해를 버텨 낸 어줍잖은 인생의 각색자에게 그나마 보내어지는 마지막 관심인 셈이다. 지금 여기서 난, 다시 혼자 새로운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늘 생각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또 하나의 낙서가 늘어간다는 것. 하지만 뜻밖에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와의 감각이 놀라우리만큼 선명하게, 혹은 선명하리만큼 놀라웁게 그와 함께 있을 때처럼 재생된다는 사실이다.
내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어 주던 그의 손짓, 나의 입술에 따뜻하게 와닿던 너무도 부드러운 그의 뺨, 그리고 너무나도 포근했던 그의 품속. 아직도 그와 함께 있던 때를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적극적인 공격으로 내 두뇌 피질을 모두 점령해 버렸다.
조금은 불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조마조마한 결말의 기대는 모든 불안을 잊게 한다. 어차피 근심이 없다면 불안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불안해하지 말자, 난 충분히 행복해 하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 불안이란 낯선 어부의 허풍을 견디어 내듯, 3m짜리 월척 한마리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닌가.
모든 근심은 미래를 지향한다는 밀란 쿤데라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오늘도 나의 근심은, 나의 불안은 과거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낙서를 모두 기억하며 살아야만 한다는 조금은 버거운 짐에 대한 근심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짐을 안고 일어서야 한다. 휘청이는 다리로 한 걸음을 겨우 떼고 쓰러져 버리고 말지라도 적어도 난 이 짐을 땅바닥에 흘려버리고 말아서는 곤란하다. 다시 포주들의 충고를 들을 수는 없다. 죽어도 난 사창가 따위에서 주저앉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그래도 정말 고마운 사실 하나는, 하느님은 그리 냉정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인생도 그럭저럭 지고 일어날 만한 무게의 고민만 우리에게 얹고 사라지는 것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천국을 믿는 것이다. 천국이 있다는 것, 그걸 존 레논은 어떻게 알았을까? 가보지 않은 곳을 믿을 수 있는 용기, 보지 않은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
'다시 일어서며'라는 투의 글을 수천번도 더 써내려간 내가 다시 가져야할 어리석은 충고, 부적절한 위로, 하지만 그나마 끌어 앉지 않으면 또 하루를 버텨 낼 수 없기에 이 효과없는 마약을 난 다시 내 팔뚝에 주사한다. 정말 난 창녀 따위가 한 낙서를 안고 평생을 살고 싶지는 않다.
존 레논은 죽었다, 그때 그의 상상도 따라 죽었다. 천국은 없다! 아마 천국이 있다면 거긴 온통 낙서 투성이일 것이다. 난 내가 누구든 잠시 쉬었다 갈 가치 정도는 있는 벤취이길 원한다.
─── kini 註 ────────
스무살의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쪼그만 녀석이 얼마나 건방졌으면, 제목봐라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