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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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ㅔ'와 'ㅐ' 그리고 몇 가지 이야기


# 언어는 살아 움직인다.

대체로 사람들은 말하는 걸 굉장히 좋아합니다. 하지만 '발음'하는 것은 굉장히 귀찮아 합니다. 언어가 진화하면서 소리 숫자는 점점 줄어듭니다.

경상도 사투리 쓰시는 남자 분 때문에 웃어보신 기억 아마 다들 있으실 겁니다. 그건 우리나라 방언 가운데 경상도 방언이 가장 적은 소리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경상도 방언이 우리 나라 방언 가운데서 가장 '진화한' 형태인 것입니다.

서울 방언에는 상대적으로 소리가 더 많습니다. 서울 방언 역시 소리가 점점 줄고 있는데 대표적인 게 'ㅔ'와 'ㅐ' 소리입니다.

어떤 발음이 남느냐 사라지느냐를 측정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그 소리를 발음할 때 X-Ray로 혀 위치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많은 사람들이 원래 'ㅐ' 위치도 'ㅔ' 위치도 아닌 'ㅔ'에 가까운 중간 위치에서 발음합니다. 이 현상은 젊은 층으로 갈수록 더욱 두드러집니다. 사실 40대 이상 되신 분 가운데서는 이 소리를 구분하시는 분들이 꽤 됩니다.

그러니까 "난 이 두 소리를 정확히 구분하는데?" 이러면 연령이 대충 가늠이 되는 겁니다 ㅡㅡ;


# 언어는 평소에 사용하는 것

인위적으로 두 소리를 구분해서 쓰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또 꼭 'ㅐ'와 'ㅔ'를 구분해야 되는 경우라면, 그러니까 '개'와 '게'를 구분해야 될 때라면 억지로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말이라는 건 우리가 평소에 자연스럽게 쓰는 것입니다. 연구 목적으로 이런 소리를 얻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이 나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건 그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겁니다. 소위 '죽을 뻔한 이야기 하게 만들기'라고 불리는 이 기법은 조사자가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어, 발음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혹은 조사 목적이 발음이 아닌 다른 것처럼 속여서 진행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렇게 조사해 본 결과 마찬가지 결론이 났습니다. 젊은 층은 'ㅔ'와 'ㅐ'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구분한다고 믿으신다면, 나이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물론 직업이 아나운서시라면 예외입니다.


# 영국 영어, 미국 영어 어느 쪽이 젊을까?

그럼 미국 영어와 영국 영어 가운데서 어떤 게 더 오래된 말일까요?

영국 영어는 'r'로 끝나는 발음의 /r/ 사운드를 거의 내지 않습니다. 그밖에도 영국 영어가 미국 영어보다 훨씬 간단한 형태일 때가 많죠.

영국 영어가 미국 영어보다 더 진화된 형태입니다. 미국 영어가 더 오래된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언어의 섬' 현상이라고 합니다. 언어가 한 지역에 고립되면 언어는 진화 속도를 늦추게 됩니다. 제주도 방안에 아래 아, 반치음처럼 이제 육지 사람들은 쓰지 않는 소리가 남아 있는 건 이 때문이죠.

제주도보다 이 현상을 더 잘 보여주고 있는 집단이 있는 바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입니다. 이 분들은 19세기에 북방에서 쓰던 한국어 형태를 거의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이 조사를 하러 가면 "아심테니요"하는 소리를 하시는 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 지역에서 "고맙습니다"는 뜻으로 쓰던 표현입니다.

최근 선교사분들을 시작으로 한국 사람들이 이 지역에 다니게 된 이후 어르신들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언어가 다시 소통되기 시작하면, 진화를 계속하게 됩니다.


# 말 끼리도 싸운다.

원래 '바람'은 바람을 막기 위한 '벽'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현재도 '바람벽'이라는 형태로 이따금 쓰기는 합니다. 둘 사이에 싸움이 붙어 '공기의 움직임'이 이겼고 '벽'을 뜻하려고 낱말 '바람'을 단독으로 쓰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바람이 승리를 거두고 보니 '바라다'의 명사형 '바람'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녀석마저 이겨버리고 맙니다.  '바라다'의 명사형은 '바람'이라고 쓰는 게 이론상 맞는데도 '바램'이라고 곧잘 사용하는 건 이 때문입니다.

늦'바람'이 달리 무서운 게 아닙니다 ㅡㅡ; (으..응? -_-;)


# '미수다' 아가씨들은 'ㅔ'와 'ㅐ'를 구분

저는 대학 시절 해마다 '방언조사'라는 걸 다녀왔습니다. 그때마다 어르신들이 정말 다양한 소리를 구분하신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지금 두 소리를 구분하신다는 분들, 조부모님 계시면 두 소리를 구분해 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우리가 구분한다고 말하는 두 소리와 실제로 어르신들이 구분하시는 소리가 얼마나 다른지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영덕 쪽에 가면 '게'를 /기/에 가깝게 발음하시기도 하지만, 확실히 '개'와는 다릅니다.)

또 원래 모국어에 'ㅔ'와 'ㅐ' 구분이 있는 분들은 한국어를 배워도 'ㅔ'와 'ㅐ'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미수다' 출연진은 대부분 이 두 소리를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거죠.

거꾸로 우리는 영어를 배워도 이 두 소리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우리 말에도 멀쩡히 차이가 있는 /l/, /r/ 소리도 사실 영어로는 잘 구분하지 못하니, 이건 뭐 ㅡㅡ;


# 구분을 못하는 건 젊다는 증거입니다.

경상도 남자분들 '음악'와 '엄악'의 발음이 똑같다고 좌절하지 마세요. 그건 경상도 방언이 그만큼 젊다는 반증이랍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도 'ㅔ'와 'ㅐ'를 구분 못한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젊다는 증거니까요 -_-)/




+
대학 다닐 때 '이딴 걸 배워서 뭐하나?' 싶었는데 뭔가 남긴 남았군요 ㅡㅡ;

댓글, 2

  • 댓글 수정/삭제 자갈
    2007.08.22 12:01

    그럼 전 상당히 젊은거네요.
    ㅐ와 ㅔ 발음은 물론 ㅓ와 ㅡ 발음도 잘 구별하지 못하는데..

    흠.. 이건 젊은 것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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