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ess_time 2009. 5. 29. 01:10
#2002년 12월 18일 저녁.
저는 대학 선배 K형,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와 같이 홍대 앞 한 바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대학생이 가지고 있는 '조선일보 기자'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나름 믿었던 양반.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퍽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정몽준 의원이 후보 단일화 의사를 철회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양반 영락없이 '조선일보 기자'가 되시더군요.
"너희가 아직 어려서 그래. '이 선배'가 되어야 너희도 살기 좋아지는 거야."
이후 새벽 6시까지 J&B를 소주처럼 마시며 길고 긴 논쟁을 벌였습니다.
쓰러질 듯 취했지만 투표장부터 찾았고 친구들에게 꼭 투표하라는 문자도 잊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개표 방송이 시작되자 '이 선배'가 이기고 있었습니다.
술자리로 나가면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 정말 대한민국은 안 되는 건가…'
1차가 끝날 때 즈음 '이 선배'는 추격을 허용했고, 2차가 한창일 때 '이 선배'가 아닌 다른 후보가 앞서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K형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 분 이름 앞에 '확정'이라는 문구가 뜨는 순간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이 올 거야."
#2009년 5월 23일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 한 호텔에서 들었습니다.
자정이 가까워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집에서 전화가 오더군요.
"형, 노무현이 죽었어."
"왜? 누가 칼로 찔렀어?"
"아니, 자살이래."
자살이라, 자살…
정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서둘러 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가면 꼭 K형을 찾아봐야겠다.
#2008년 10월 3일
가장 친한 대학 동기가 경기도 구리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모처럼 만난 반가운 얼굴들.
하지만 다섯 달만에 만난 K형에게 선뜻 말을 걸지 못했습니다.
유난히 야윈 얼굴, 턱 아래로 나 있는 수술 자국.
K형은 설암(舌癌) 수술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한 달 전 쯤 '형, M 시집 간다는데 술 한잔 해야죠?'하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당분간은 곤란하다. 개인 사정이 있어서.' 하고만 돌아온 답변.
결혼식이 끝나고 둘이 동서울터미널까지 같이 버스를 타고 오면서도 별 말이 없었습니다.
"나 아픈 거 어떻게 알았냐?"
"형, 저도 기자에요. 그 정도 취재는 해요."
광나루역에서 먼저 내리는 형한테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빨리 나아요." 그 흔한 한마디도.
겨우 문자를 보냈습니다.
"형이랑 술 안 마시니까 이상해요. 얼른 옛날로 돌아와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렇게 쉽게 낫는 병이 아니어서…"
#2009년 5월 23일
한 참을 자다가 문자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헤럴드경제 K기자 사망.
형도 자기 병원에 있는 모습 보이기 싫다고 문병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저도 그런 형 성격을 알아서 일부러 찾지 않았습니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통화도 곤란했죠.
"형, A가 빨리 나으래요."
돌아온 답문은 "알았다" 세 글자였습니다.
"알았다" 이 세 글자가 형이 제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형은 이미 한 줌 재가 돼 있었습니다.
#2009년 5월 29일
일부러 형이랑 같이 갔던 술집만 골라 다니며 왕창 취했습니다.
맏이에 그것도 종손으로 자란 제게 평생 처음으로 형 노릇을 해준 사람이었는데…
이 나이에 어리광을 피워도 씨익 웃으며 받아주던 형이었는데…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랑 같이 가려고 그렇게 가셨소?
끝까지 나한테 아픈 모습 보이기 싫어서 그렇게 나 못 올 때 가셨소?
형만 아니었으면 보수신문 기자라 노무현이 죽어도 안 슬퍼한다는 소리 안 들어도 됐을 텐데… 이렇게 마지막으로 어리광 한 번 더.
잘 가시오. 그렇게 좋아하던 양반이랑 나란히 손 잡고 잘 가시오.
다음 생에도 꼭 내 형으로 만납시다. 그래서 늙어서 노인정에서 돼지 껍데기 구워 먹자던 약속 그 때는 꼭 지킵시다.
정말 잘 가요, 형.
형이 있어서 내 20대가 정말 행복했어요.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