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윤동주(1917~1945)는 '국민 시인'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윤동주는 지금 정도 평가를 받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정부에서 1990년 8월 15일이 되어서야 윤동주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는 게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평가를 바꾼 인물이 마로 마광수 연세대 교수(65·국문학)였습니다. 마 교수는 1984년 박사 논문 '윤동주 연구'에서 국문학 역사상 처음으로 윤동주의 모든 시를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에 '부끄러움'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집에서 윤동주 시를 해설한 내용은 거의 대부분 이 논문에서 따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 교수는 이 논문에 "특히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학적이며 자기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보기를 들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앞서 말했듯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되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적 이데올로기(또는 사상)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 보면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이 논문에는 이런 구절도 등장합니다. "문학의 효력은 서서히 나타나 인간의 의식 자체를 변모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이란 이성과 감성,본능과 도덕이 합쳐서 이룩되는, 보다 통체적인 직각(直覺)의 양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윤동주는 옥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총각귀신'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문장이 그런 뜻이 아닌 줄은 알지만 어쩐지 마 교수 이미지 때문에 다르게 읽히기도 합니다(응?).
그런데 만약 지금처럼 친일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시대라면 윤동주가 지금 같은 지위를 얻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윤동주는 1942년 히라누마 도슈(平沼東柱)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했다.
그래서 다시 마 교수 논문 구절로 마무리. "그러나 역사는 이상하게도 '투사'보다는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을 한 시대의 상징적 희생물로 만드는 일이 많다. 윤동주는 바로 그러한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일제말 암흑기, 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
※아, 1989년에 새 맞춤법을 적용하기 전에는 성(姓)하고 이름을 띄어썼습니다. 이 글은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프로배구 경기를 기다리며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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