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원더스 해체와 관련해 취재하고 있었는데 '어른들의 사정'으로 인해 지면에 실리지 못하게 돼 취재를 중단했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아시아 경기 때문이다.) 그 사이
몇몇 매체에서 [단독] 기사를 내며 '
누군가 부풀린 사실'을 바로잡고 있지만 원래 믿지 않은 이들은 끝까지 믿지 않게 마련이다.
• 비록
그들을 (멀리서) 지켜본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열정에게 기회를"이라는 타이틀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나 또한 그들의 성공을 바랐다. 나는 눈치없이 추석을 맞아 원더스 관계자에게 "팀 발전을 빌겠다"는 메시지도 보냈다. 그들이 더 이상 땀과 눈물을 흘릴 기회가 사라졌다는 건 나 역시도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다.
• 그러나 '가해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 불 낸 집에 늦게 도착한 소방관은 가해자인가 가해자가 아닌가. 게다가 나쁜 사람은 상대를 피해자로 만들고, 그보다 더 나쁜 사람을 상대를 가해자로 만드는 법이다.
• 누군가를 '조지는' 기사를 쓸 때 선배들이 자꾸 기사를 고치고 또 고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터. 그러면서도 '눈물 쏙 빼게 쓰라'는 모순적인 지시를 받는다. "팩트에 대한 탐구가 게으를 때 우린 그 빈틈을 상상력으로 메우려" 하는 나태함 같은 건 처음부터 설 자리가 없는 거다
• 유명한 실험이 있다. 속으로만 멜로디를 생각하면서 책상 바닥에 주먹으로 리듬을 친다. 그럼 상대가 노래 제목을 맞출 확률은 얼마나 될까? 치는 사람은 절반 이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무엇인가를 한번 알게 되면 그걸 모르던 때로 돌아가는 건 정말 쉽지 않을 일. 그래서 언론에는 데스크가 존재하고, 그 데스크를 데스크도 있다. 이 구조가 언제나 가장 좋은 결과물을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
지식의 저주'로부터는 일정 부분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준다.
• 이 과정에서 기자는 팩트를 추가 취재하거나, 기사에서 빼먹었던 부분을 보강하게 마련이다. 이런 과정 없이 한 쪽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건 기사가 아니라 소설에 가깝다. 처음부터 소방관이 방화범과 한 패거리였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원래 우리 편은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고, 상대편은 생각만큼 그리 악하지 않다.
• 독일 나치 정권에서 선동을 맡았던 괴벨스는 말했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반박하려면 문서 수십 장과 증거가 필요하다. 게다가 사실이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한 뒤다."
• 그래서 여전히 모르겠다. 나는 그저
사실이 궁금할 뿐인데 왜 자꾸 이 사회는 내게 어느 편에 설 것이냐고 묻는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