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총명불여둔필
assignment Scribble/.OLD

길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

access_time 2008.07.27 21:33
도대체 그녀는 누구였던 것일까.

요즘의 내 생활이란 어느 정도냐 하면 손에 뻔히 담배를 쥐고도 조금 전까지 피우던 담배를 어디다 뒀는지 몰라 헤매는 꼬락서니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그저 순간적인 건망증일 뿐 딱히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고 믿었다. 적당한 건망증은 삶이 내린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그럭저럭 지낼 정도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모처럼 메일 박스를 정리하다가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누군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여자 아이한테서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더군다나 이미 답장까지 보낸 상태였다.

코피는 이제 멈췄나? 그러게 야한 것좀 그만 보라니까 ㅋㅋㅋ 하영이는 이만 자려구. 그럼 오빠도 답장 써, 안녕.

하영, 김하영. 더이상 쓰지 않는 전화기를 꺼내 전화번호부를 검색해 봤지만 그런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2001년 3월 25일, 그녀는 어째서 내게 그런 메일을 보냈던 걸까.

과외를 마치고 돌아오는 64번 버스 맨 뒷자리에 푹 눌러 앉아 한참을 생각했지만 세류사거리에서 신호등 걸려 펑 오래 멈춰있는 동안에도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컴퓨터 전원을 켜고 군대 가기 전에 정리한 아웃룩 주소록까지 뒤졌지만 역시나 그런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친한 친구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녀석 또한 모르긴 마찬가지.

바람둥이, 지가 만난 여자 이름도 기억 못하고 다니냐. 아냐, 그런 거 같지는 않아. 도무지 누군지 감이 안와.

김하영, 김하영, 그녀는 도대체 누구였던 걸까. 아니, 난 언제 코피를 흘렸던가. 하긴, 난 여자들이 생리하는 것보다도 더 자주 코피를 흘린다.

어쩌면 그 여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든 채팅방에 들어왔던 여자. <니 심장을 한입 베어물면 슈팅 스타 맛이 날까>하는 그렇고 그런 방에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

아니다, A4를 여섯장이나 번역해줬는데, 번역하는 도중엔 계속 덜 됐냐고 귀찮게 문자 메시지를 날리더니 번역본을 받자 마자 연락을 끊어버린 그 몹쓸 전문대생인지도 모른다. 밥 한 끼의 약속을 끝끝내 져버린 그 여자 말이다.

아니다, 검은 나시에 검은 긴 치마를 입고, 머리까지 정말 검게 물들였던 그 홍대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얀 팔뚝이 유난히 두꺼워 보이던 그 여자 말이다.

아니다, 곤색 바지에 검은 구두를 신은 주제에 자랑스럽게 흰양말을 내 놓고 다니던 그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어린왕자>를 수 백 번 읽었다던 바로 여자애 말이다.

아니다, 누가 좋아해주면 감지덕지할 만큼 못생긴 주제에 '남자가 자기를 좋아하면 웬지 부아가 치민다'는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그 미장원 집 딸 말이다.

아니다, 만성 변비에 늘 손발이 차가웠던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그 메이크업 전공생 말이다.

아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준비한다던 18살짜리 여자애였던 것도 같다. 어울리잖게 독실한 크리스찬이던 그 계집애 말이다.

아니다, 발가락이 정말 내 것만큼이나 길었던 178짜리 여자애였는지도 모른다. 맥주병에 달라 붙은 라벨을 계속 쥐어 뜯던 그 여자애 말이다.

아니다, 노래방에서 2시간 동안 계속 댄스곡만 불러 제끼던 아대 심리학과 여자애였는지도 모른다. 유행도 지나버린 루즈삭스를 신고 있던 그 여자 말이다.

아니다, 왼손으로 젓가락질 하는 게 정말 부자연스러웠던 그 직장인이었는지도 모른다. 'CH 채널'을 정말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씨 채널]이라고 읽던 그 여자 말이다.

아니다, 종덕이라는 남자 이름을 가졌던 여자애였는지도 모른다. 고향이 전남 광양인 여자애 말이다. 아니, 아니다, 걔는 이름이 '종덕'이 아닌가. 김하영이 아니라, 박종덕인 것이다.

김하영, 김하영, 김하영이라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그 여자가 누구였는지 떠올리고 있는 데만 시간을 허비해 버릴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한동안 김하영 이라는 이름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다시 '김하영'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 건 선배가 <로얄 샬루트>를 쏘겠노라 불러낸 술자리였다.

그 선배도 나름대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물론 한대수의 그것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늘어놓자면 대략 이렇다.

고등학교가 다니기 싫다며 1학년을 마치자마자 자퇴를 했다. 그해 8월에 검정고시를 쳐서 다음 해 봄에는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이 맘에 안 들었는지 재수를 했고, 그래도 남들보다 1년 일찍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대로 대학을 잘 다니는가 싶더니 조용히 잠수를 탄지 1년만에 다시 행정고시 합격 46회 장준요,라는 플랜카드를 모교 교문 앞에 붙게 만들었다. 최연소는 아니었지만, 두번째로 어린 나이로 합격했으니 남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붙은 것만은 틀림없다.

그 길로 장교 지원을 해 군대를 다녀오더니, 이번에는 중앙일보에 차석으로 합격해 버렸다.

그 생활도 1년, 프리랜서 글쟁이 노릇을 하며 이런저런 데다 글써주며 살더니 이번에는 '컴퓨터 게임 캐릭터 개발자'라는 명함을 불쑥 내밀어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이름이 뭐야? 장준요.하면 남들이 성은 따로 있고, 이름이 장준인 줄 안다며 이름을 바꾸고 싶어 했던 그 선배의 입에서 "요즘도 하영이랑 연락해?"하는 소리가 나왔던 거다.

김하영,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랑 어떻게 연락을 하며 산단 말인가.

"김하영이 누구에요?"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준요 형은 내 몫은 스트레이트 잔에 자기 몫은 온더락 잔에 따르면서 "요즘 하영이가 많이 힘들어 하는 거 같더라. 그날 둘이 죽이 잘 맞던데 왜 계속 연락이라도 하고 지내지 그래?"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도무지 그녀가 누구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고는 할 수 없다.

길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이 반가운 척 알은 체를 했는데, 도무지 그가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해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난 그녀를 모른다기보다 다만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것뿐이다.

언제 형이랑 마지막으로 만났더라?

그때 어떤 여자랑 같이 있었든가. 아니,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우리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준요 형이랑 동기인 남자 선배였다.

나는 그날 코피를 흘리지도 않았고 전혀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름이 끊길 일도 없었다.
 
오히려 취한 쪽은 준요형이었다. "여기 키핑 되겠지?" 하며 큰병을 시켰는데 결국 그 병을 다 마셔 버렸고 형은 길바닥에 누워버릴 만큼 취했다.

그 날 형을 여관에서 재웠든가. 아니, 누구한테 전화를 해서 형을 데리러 오라고 말했든가.

그때 어느 여자인가 형을 데리러왔고 그 여자가 김하영이라는 이름을 가졌든가.

아니다, 그날은 분명 내가 택시를 타고 형을 집까지 데려다 줬었다.

문 열어주는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집이었다. 형의 주머니를 뒤져 내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고 형 때문에 차 끊겼으니까 이건 내가 가져간다 하며 만원을 형 지갑에서 꺼내 택시비로 썼다.

난 취할래야 취할 수 없었고 집에 들어와 샤워를 마치기 전까지는 단 일초도 잠들지 않았다. 아무리 건망증에 시달린다 해도 며칠 전에 만난 사람을 기억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아니, 아니다. 나는 지금 김하영이라는 사람을 조금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질 않는가.

3월 25일이라면 형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즈음이다. 어쩌면 그날 형과 함께 자리를 했던 사람은 다른 선배가 아니라 그 김하영이라는 여자였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취한 사람은 나였고 적당히 취해 주저리 실없는 말들을 늘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낮은 천장에 부딪쳐 코피를 흘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꼭 그때 코피를 흘렸어야 할 필요는 없다.

화장실에서 취한 남녀의 정사라도 몰래 엿보고 돌아왔노라 떠벌리는데 나도 모르게 코에서 주룩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집에 돌아가는 길까지 코피가 멈추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걸 보고 그녀가 놀려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만남이었다면 그 메일 주소를 알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한메일 주소를 알려주는 경우는 그다지 안면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아니다. 다음의 사람 찾기 기능을 이용해 그녀가 나를 놀래주려 메일을 보냈는지도 모를 일일 터이니 말이다. 선배의 말만이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게 할 유일한 실마리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선배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해 어떤 말도 늘어 놓지 않았다. 그저 술 잔만 채우고 비우고 또 비우고 채우며 담배만 계속 피워댔다.

-그래, 요즘은 뭐하고 살아?
-그냥 알바하고 사람들 만나서 술 마시고 그러지.
-글은 안 써?
-대단한 건 안 쓰고 그냥 번역 연습이랑 습작이랑 동시에 해보려고 팝송 가사 번역하고 가사에 맞게 얘기나 지어내면서 그렇게 보내.
-그럼 언제 내 이야기도 한번 써주는 거야?
-까짓것 로얄 샬루트 따위도 사주는데 그 정도도 못해주겠어?

시시콜콜한 일상의 얘기로 양주가 좀더 비워졌을 때까지도 형은 김하영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늘어놓지 않았다.

- 이 가게 말야, 처음 왔을 때, 은희경의 [인 마이 라이프]를 떠올리게 만들었어. 전혜린이라는 여자가 주인으로 있던 그 카페 말야.  사실 비싼 술을 먹기엔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니지, 싼 맥주 몇 병에 마른 안주나 놓고 노닥거려야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잖아. 사람들을 물고기처럼 보이게 하는 유리창 하나 없이 벽돌로 사방을 둘러 싸 놓고, 자리도 몇 개 없어서 사람이 너댓명만 와도 앉을 자리도 넉넉치 않아. 과일 안주 하나에 맥주 몇 병만 시키만 밖에서 사온 술도 이렇게 마음 대로 먹게 해주는 집이고 또 60년대 라디오 디제의 목소리 같은 여주인의 목소리도 마음에 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냥 참 아늑하고 포근해. '세 평 반 속의 행복'이라? 그럴 듯한 가게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어. 언젠가 이 가게가 문을 닫게 되면 참 많이 아쉬울 것 같아. 이 눅눅한 팝콘의 맛도 말이야.

There are places I'll remember
내 인생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곳들이 있지
All my life though some have changed
내 삶을 통해 어떤 곳은 변하고
Some forever not for better
영원하지 않더라도 더 낫게 되었고
Some have gone and some remain
어떤 곳은 사라지고 어떤 곳은 남아 있어도
All these places have their moments
이 모든 장소는 그들만의 순간을 가지고 있네
With lovers and friends I still can recall
여전히 소중한 연인 그리고 친구들과의 기억
Some are dead and some are living
어떤 이들은 죽었고, 어떤 이들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In my life I've loved them all
내 일생동안 난 그들 모두를 사랑했네

But of all these friends and lovers
이 모든 친구와 사랑하는 이들 중에서도
There is no one compares with you
당신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And these memories lose their meaning
지나가 버린 추억들은 모두 의미가 없네
When I think of love as something new
사랑은 이미 새로운 것
Though I know I'll never lose affection for people and things that went before
함께했던 친구들, 지나간 세월, 그들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겠지만
I know I'll often stop and think about them
때로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때를 생각하겠지
In my life I love you more
앞으로의 내 삶에서는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터임으로

Though I know I'll never lose affection for people and things that went before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 함께한 추억, 그들에 대한 사랑이야 변함이 없겠지만
I know I'll often stop and think about them
나는 애써 그들을 기억할 시간을 따로 떼어 둬야 하리라.
In my life I love you more
앞으로의 내 삶에서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일 것임으로
In my life I love you more
인 마이 라이프, 아이 러브 유 모어.

좀 취했는지 화장실을 다녀오다 잔에 부어진 술을 조금 쏟아 버리고 말았다.

임마, 그거면 오 천원은 되겠다.

잔에 술을 마저 채우며 형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참 요란스럽게 살려고 기썼던 것 같아. 생각해 보면 학교도 제대로 마쳐본 적 없고 정말 고시만 보면서 살았나봐. 검정 고시 행정 고시 언론 고시. 일부러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려고 일부러 미친 척 했나봐. 너무 미친듯이 젊음을 낭비해 버린 기분이야. 여자도 내겐 냄비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어. 하영이도 말야. 걔 내가 처음이었나 보더라. 아니, 그래서 죄책함이 든다거나 하는 건 아냐. 난 스물 두 살짜리 숫처녀가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그냥 내가 너무 강제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 같아서 그게 좀 미안해서 그래. 그래도 니가 걔 좀 잘 챙겨줬으면 하는 바람에 그냥 말 꺼내 본 거야. 학교도 좀 잘 다니게 만들고 시험 빼먹지 말고 다 보게 하고 말야.

정말 김하영이 누군지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나는 취한 김에 그러겠노라 답을 해버렸다.

고맙다. 자 들자.

결국 형과의 술자리는 새벽 여섯시까지 이어졌고 우리는 연세대 잔디밭에다 전날 마신 것을 모두 토해 버리며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고 나서 지하철 첫차를 타고 각자 집을 향했다.

까짓 누군지 모르면 어떠랴. 내 약속이 거짓말이었다면 어떠랴. 어차피 모두 지어낸 이야기의 결말이 떠오르지 않아 억지로 짜맞춘 것에 불과한 것을. 고작 노래 가사 하나 번역하기 위해 쓰잘데기 없이 길게 가져다 붙인 것에 불과한 것을.

깨질듯한 두통에 눈을 떠보니 언제 갈아탄 건지 버스 좌석에 기대 졸고 있었고 버스는 아마 종점에 도착해 있었다.

어딘지 낯설긴 했지만 익숙한 노선이 보이길래 2-1을 잡아 타고 계속 졸면서 앉아 있다가 집에 도착하자 마자 옷도 벗지 않은 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깨어나자마자 서둘러 리플 버튼을 클릭했다.

어제 준요형이랑 만났어. 형은 두 번이나 비틀즈의 [인 마이 라이프]를 신청했어. 아, 오늘 아침엔 코피가 안 나서 다행이야. 요즘 바빠? 내일쯤 만났으면 하는데 시간 있겠어? 괜찮으면 연락하구. OK?

과외 하러 가는 길에 둘러 봤는데 내가 아침에 내렸던 종점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64를 탈 수 있었고 괜히 2-1을 타고 먼 길을 돌아 취한 발걸음으로 다시 걸을 일 같은 건 없었다. 내 시선이 향하던 바로 뒤 편은 모두 익숙하게 알고 있던 곳이었다.

바보. 난 다만 취해서 기억을 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도무지 누군지 알 수 없다면 만나보면 그뿐이다. 만나서도 누군지 알 수 없다면 다만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기억하고 있지 못했던 거라면 이제부터라도 다시 기억하면 그뿐이다.

자랑삼아 고백하건대 나는 이제 그녀가 누구였는지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할 것도 같다.


─── kini註 ────────
2001년 6월 24일
문장을 이렇게 터무니없이 난잡하게 썼다니 -_-;;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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