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던 지진 소식에 이어 지하에 갇혀 있던 광부들 탈출기까지 올해는 여느 때보다 우리 언론에도 칠레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올 2월에 칠레에 다녀왔습니다.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라는 주제로 다룰 예정이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기사화하지 못했던 글을 소개합니다. (읽어보시면 왜 기사가 못 됐는지 아실 겁니다 -_-;;)
칠레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대한민국이 반긴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 국제공항에 내리면 국내 대기업에서 만든 액정표시장치(LCD) 화면에 ‘¡Bienvenidos a Chile!(칠레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뜻의 스페인어)가 뜬다.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한국산 휴대전화 광고가 곁을 지킨다. 공항 청사 밖으로 나와도 마찬가지다.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도 한국산, 이 택시에 끼운 타이어도 한국산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한국 사교육 업체에서 칠레에 차린 학원도 보인다.
모두 2004년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생긴 변화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두 나라는 FTA를 계기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2008년 기준으로 한국은 칠레에 제품을 다섯 번째로 많이 수출하는 나라고 한국은 칠레 제품을 여섯 번째로 많이 수입한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칠레 사람들은 한국은 잘 몰랐다. "처음 한국에 가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거기 왜 가냐'는 반응이 많았어요. 한국 경제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르는 이들이 많았던 거죠."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1시간을 더 날아가 푸에르토 몬트에서 만난 구스타보 아라야 씨(38) 말이다.
아라야 씨가 자동차 먼지 위에 한글로 쓴 자기이름
올해 건국 200주년을 맞이한 칠레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57개국과 FTA를 맺으며 경제 개발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세계적 경제 침체를 벗어난 2003년 이후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4~6%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칠레는 올 1월 남아메리카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아라야 씨는 1997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칠레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나라를 찾았다. 해외에 나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칠레는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아시아에서 시작한 글로벌 경제 위기는 칠레에도 닥쳤다.
아라야 씨는 "친구들 대부분은 말이 통하는 스페인을 가장 선호했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가 시작한 곳을 찾아가자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본 회사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에 (문화가 다른) 동양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아라야 씨가 14개월 동안 경희대에서 공부하는 데 든 돈은 전부 우리나라 정부에서 장학금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향수병(鄕愁病)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홀로 두고 온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주한 칠레대사관에서 주말마다 여는 모임도 참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랴아 씨는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던 아내는 우리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지금도 아내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이유"라고 웃으며 "그래도 내가 한국에서 더 많이 배워서 돌아가야 우리 가족, 우리나라가 더 튼튼해질 거라고 굳게 믿어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가 한국을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원동력이 됐다. 아라야 씨는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 사는 모양새를 살폈고 아르바이트도 열심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재연 TV 프로그램 아르바이트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자꾸 미국인 배역만 시키더라"며 웃었다.
아라야 씨가 1998년 한국을 찾았을 때는 외환위기로 우리 국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아라야 씨 눈에는 특히 '금 모으기 운동이' 운동이 남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칠레도 1970년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맞았다.
이 때 칠레 국민들도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던 역사가 있다.
아라야 씨는 "한국과 칠레는 경제 성장 과정이 비슷하다. 한국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면 칠레에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이 있다. 둘 모두 독재자라는 오명과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는 평이 공존한다"고 말했다.
1970년 사회주의 성향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칠레에 들어섰다. 세계 최초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지만 지지율은 높지 못했다. 아옌데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가 이끄는 칠레 공산당과 단일화를 이뤘지만 지지율은 30%대에 그쳤다. 집권 이후 경제 정책은 잇따라 실패했고 인플레이션은 걷잡을 수 없었다. 아옌데 정권은 결국 1973년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로 무너졌다. 아옌데 대통령은 자살했다.
피노체트는 1990년까지 17년간 독재를 계속했다. 피노체트는 이 기간 동안 3197명(칠레 정부 조사 결과)을 살해할 정도로 공포 정치를 펼쳤다. 피노체트가 공식 석상에서 "내 말이 없으면 나뭇잎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튼 프리드먼이 '칠레의 기적'이라고 표현할 마큼 경제는 호황이었다. 미국 시카고대 출신을 중심으로 구성한 경제학자 모임 '시카고 보이즈' 의견을 받아들여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펼친 결과였다.
아라야 씨는 "한국이 남북으로 나뉘어 벌인 이념 갈등을 우리는 내부에서 겪은 셈"이라며 "피노체트가 경제 발전을 이룬 원동력 중 하나는 임금 동결이었다. 또 국민들이 자유를 많이 제한당해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고 젊은이를 중심으로 저항 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피노체트 일가는 칠레에서 가장 부유하다. 피노체트가 2006년 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사법 처리를 하지 못한 까닭이다. 피노체트가 세상을 떠난 12월 10일은 우연히도 세계인권선언일이었다.
아라야 씨는 2006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 초청으로 두 번째 한국 땅을 밟았다.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한국에서 공부하고 돌아간 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새로운 한국을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아라야 씨는 "일단 인천국제공항에 처음 내려 '한국이 이만큼 더 성장했다'고 생각해 놀랐다. 인청공항은 김포공항하고는 정말 차원이 달랐다"고 말했다. 칠레는OECD 정식 회원국이 됐지만 아라야 씨는 여전히 한국이 부럽다. 그는 "한국에서 유행이 지나면 칠레는 이제 시작한다고 보면 된다. 휴대전화만 봐도 그렇다.
칠레는 이제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을 시작하는 단계"라고 전했다.
구리와 철을 제외하면 칠레는 천연 자원이 풍족한 편은 못 된다. 여전히 전체 산업 50%는 광산업 차지다. 아라야 씨는 "처음 한국을 찾았을 때 자동차 공장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그 다음에는 정보통신(IT) 기술이었다. 칠레도 산업 구조 개편이 빠른 편이지만 한국의 성공적 변화는 여전히 배워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
거의 10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은 여전히 정겨웠다. 그는 자신이 다니던 경희대 기숙사를 일부러 찾아 식당 아주머니들한테도 일일이 인사했다. 아라야 씨는 "먼저 스스럼없이 다가와 '(한국어로) 더 줄게 많이 먹어'하시던 모습이 칠레에서도 계속 기억이 났다"고 말했다. 한국 문화의 모든 것을 알고 싶던 호기심도 여전했다. 아랴야 씨는 "정부 초청 장학생들하고 호텔에서 밥을 먹는데 산낙지가 나왔다. 모두들 기겁을 했지만 나는 그것도 한국 문화라고 생각해 거리낌 없이 삼켰다"고 웃으며 말했다.
칠레 한국인 유학생 모임 회장인 아라야 씨는 자기가 사는 푸에르토 몬트를 "한국 부산과 지역 정서가 비슷하다"고 소개했다. 그는이곳에서 300km 북쪽에 있는 비야리카(Villarica) 등지를 오가며 연어를 키운다. 이 회사에서 그가 맡은 일은 북유럽이나 캐나다, 미국에서 연어 알을 사와 이를 키운 뒤 바다에 있는 양식장까지 옮기는 것이다.
아라야 씨가 일하는 양식장에서 키운 연어 80~90%는 일본으로 수출한다. 자연스레 칠레에서 접촉하는 인물도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많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칠레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2240여 명으로 그 중 90% 이상인 2100여 명이 산티아고에 산다. 캠퍼스 커플로 만난 아라야 씨 아내도 양식업에 종사한다.
지금 회사로 옮기기 전 아내가 다녔던 회사는 사장이 한국인이었다. 아라야 씨는 "한국어를 거의 잊었지만 '안녕하세요. 아내 잘 부탁해요'하는 인사에도 사장님이 참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한국은 국가 경제력은 세계 10위권이면서도 국민들이 '우리는 아직 못 산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강하다"면서 "한국 학부모들이 너무 영어 공부에 집착해 놀랐다. 예전에는 안 산다는 한국 물건을 팔아야 했으니 영어가 필요했다. 이제는 한국 물건을 사려는 나라가 한 둘이 아닌데 한국어 보급이 저조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얼핏 한국과 큰 연관이 없는 일을 하는 것 같지만 한국에서 보고 배운 시장 경제를 통해 지금 일자리에서 제 몫을 할 수 있다. 한국은 내게 여러 기회를 준 참 고마운 나라"라고 말했다.
칠레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진 소식이 들렸다. e메일로 안부를 묻자 "걱정해준 덕분에 다 괜찮다. 한국에 다시 가기 전까지는 별 일 없을 것이다. 꼭 부산에서 산낙지 같이 먹자"고 답장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