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때 아내하고 가수 이문세 씨(57)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공연 초반 잔잔한 곡 위주로 레퍼토리를 풀어가던 도중 '소녀'가 나오니 객석에서 유독 큰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 TvN 연속극 '응답하라 1988' 영향이었겠지요. 밴드 혁오의 리더 오혁 씨(22)가 리메이크한 이 곡은 각종 음원 차트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사실 가요계에서 리메이크한 노래가 이렇게 인기를 끄는 건 드문 일은 아닙니다. '붉은 노을'이 아이돌 그룹 빅뱅 노래인 줄 알았다는 게 철지난 개그가 됐을 정도입니다. 때로 리메이크 과정에서 잡음이 들리기도 합니다. 선배 가수가 분명히 리메이크 반대 의사를 피력했는데도 후배가 멋대로 리메이크를 강행했다는 식이죠. 거꾸로 이런 행위가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지금이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적어도 수십 가지는 될 테지만 예전에는 직접 연주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작권이 보호하는 대상도 악보 그 자체였습니다. 요즘 영화를 보면 함부로 복사하면 안 된다는 문구가 뜨는 것처럼 19세기 후반까지도 악보를 마음대로 인쇄하거나 복사하는 행위는 형사 처벌 대상이었습니다. 마음대로 악보를 그려 다른 장소에서 연주하는 것도 무단복제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다가 '플레이어 피아노(player piano)'라는 녀석이 세상에 나오면서 틈이 생겼습니다. 플레이어 피아노는 기계적인 프로그래밍으로 미리 연주 내용을 입력해 두면 자동으로 피아노를 치는 장치였습니다. 기계적 프로그래밍이라는 게 별 대단한 게 아닙니다. 종이에 구멍을 뚫어 자동 연주 장치를 부착한 피아노가 악보를 읽어들일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었죠. 아래 그림처럼 말입니다.
이 종이 롤은 분명 악보를 토대로 한 건 맞지만 악보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악보를 '복사(copy)'한 건 아니었죠. 그러니 이를 법적으로 제재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도 함부로 틀지 못하는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처럼 들리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저작권료를 한 푼도 내지 않은 채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존 필립 수자(1854~1932) 같은 작곡가들은 "플레이어 피아노가 악보 수요를 감소시켜 결국 작곡가들의 밥줄을 끊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이에 대한 갑론을박은 송사(訟事)로 이어졌고 미국 연방 대법원은 1908년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술과 자본이 맞설 때는 법원이 자본 손을 들어주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 대법원은 "플레이어 피아노가 연주하는 악보를 사람은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복사했다고 볼 수 없고 따라서 작곡가에게 로열티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누군가 피땀 흘려 만든 걸 아무나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게 되면 결국 누구도 피땀 흘리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기본 상식. 그래서 1908년 이후 미국 음악 시장은 고사(枯死)하기 시작했습니다. 맨날 예전에 듣던 노래를 다시 듣는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결과 1960년대 중반에는 비틀즈를 비롯한 영국 록 밴드들이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감행했고, 1990년대는 '마카레나'를 앞세운 스페인 음악에 무릎을 꿇은 데 이어 21세기는 '강남 스타일'을 비롯한 K팝에 시장을 모두 내주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조지 거슈윈(1898~1937)이 그 유명한 '랩소디 인 블루'를 쓴 게 1924년이고, 1927년 나온 '푸팅 온 더 리츠(Puttin' On the Ritz)'는 거의 90년이 지나 태평양 반대편 반도국에서 표절 논란이 일 정도였습니다. 그 뒤로도 미국 음악이 어떻게 전 세계를 지배했는지는 일일이 열거하는 게 불가능할 지경. 마음대로 음악을 베낄 수 있게 했는데도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뭘까요?
연방 대법원 판결 의미를 바꾼 제일 큰 사건은 바로 이듬해 나왔습니다. 연방 의회에서 기계적으로 악보를 재생하는 것 역시 저작권법 적용 대상에 포함시킨 겁니다. 저작권법 적용 대상이 악보에서 '음악'으로 늘어난 겁니다. 의회는 또 모든 창작곡은 '의무적으로(강제적으로)' 라이선스를 얻도록 규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작곡가에게 2센트만 내면 누구나 곡을 복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는 '작곡가들이 불쌍하니 도와주자'는 취지가 아니라 독점금지법 때문이었습니다. 플레이어 피아노 업계 1위이던 이올리언은 의회가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걸 예상하고 노래 저작권을 앞장 서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다른 회사들이 '이러면 우리 다 죽는다'고 의회로 몰려갔죠. 그래서 의회는 모든 회사가 종이에 구멍을 뚫어 플레이어 피아노 안에 넣을 수 있도록 '의무 라이선스' 조항을 생각해냈습니다.
여기서 '아무나'가 꼭 플레이어 피아노 제조사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가수들도 똑같은 비용만 지불하면 남의 노래를 연주하고 심지어 원하는 대로 편곡하는 것도 가능하게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3000명이 넘는 가수가 비틀즈 '예스터데이'를 리메이크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산업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모두 음악을 키운 원동력이죠. 직접 원래 작곡자를 만나 동의를 구할 필요 없이 돈만 내면 됐으니까요.
한국에서는 이럴 수 없습니다. 아니, 이러면 안 됩니다. 사단법인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리메이크를 해서 음반을 내려면 "원 저작자에게 개작에 대하여 필히 허락을 득하여 동의서를 첨부"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메이크 과정에서 '예의 논란'이 끊이지 않아 생겨난 주자학적 횡포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내 새끼'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놈한테 얻어터지는 듯한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한국은 '강제 라이센스' 방식도 아닙니다. 원한다면 서태지처럼 자기 저작권을 개별 관리해도 괜찮습니다. 반면 미국은 아예 상대가 리메이크하겠다면 이를 거부할 권리조차 없습니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 씨는 2008년 '한겨레 21'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모든 걸 시장주의에 맡긴단다. 만약 그 논리를 음악 저작권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적어도 현 상황에서는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것 같다"고 썼습니다. 맞습니다. 미국 사례가 이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한겨레 21 편집진에서는 이 칼럼에 "저작권자의 의사 고려하지 않고 사용료만 내면 오케이라니, 이런 이상한 일이 어딨나"라고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래야 음악이 살아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도의적으로 양해를 구하는 게 저 역시 옳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1학년 도덕 시간에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배우는 데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그랬으면 좋겠다'는 모든 걸 법으로 만들지 말라는 이유도 저 도덕 교과서 문장에 녹아 있는 게 아닐까요.
원래는 연말 모임 때 아내 친구들이 리메이크 논란을 주고 받길래 정리하는 차원에서 써보려했던 건데 쓰다가 영 이상한 길로 빠졌습니다. 그래도 써둔 게 아까워 블로그에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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