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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확신 그리고 '황희정승'

나는 진심으로 황희 정승을 존경한다.

혹시 오해하실 분들을 위해 밝히자면, 황희 정승은 본관이 장수이고 나는 창원 황씨다. 그러니까 그가 나의 선조라고 해서 내가 이 양반을 존경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역사를 생각할 때, 종씨라고 해서 피가 섞였다는 보장은 없겠지만.

물론 고위 공직자로서 검소한 삶을 누린 것 역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하지만 혹시 처갓집이 부유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의 마음을 거두기는 어렵다. 대통령도 영부인을 무서워하는 게 사실인데, 조선시대 재상이라고 달랐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양시론(兩是論)은 오늘 날에도 분명 되새겨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믿는다.

일단 하인들의 소란에도 황희 정승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모두 들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이런 태도를 지적하는 아내의 태도 역시 인정.  결국 황희 정승은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사건을 정리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아마 이성 친구와 싸운 경험이 있다면 '화'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것이다. 분노는 오해와 가능성을 확신으로 바꾼다. 그래서 화가 난 사람은 남의 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상대의 말은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자기 말을 할 시간도 모자란다.

뒤이어 황희 정승은 하인 둘 모두의 말을 인정하고, 둘 모두 옳으면 누가 틀린 것이냐는 아내의 말 역시 인정했다. 혹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라쇼몽(羅生門)> 보셨는지? 그렇다면 '상대적 진실'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이러니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듣지는 못했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소동이 종료될 수 있었다. 그 얼마나 부드럽고 명쾌한 해결책인가. 황희 정승이 무려 18년 동안이나 정승 자리를 누릴 수 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이 '말랑함'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현재로 돌아와 보자. 정치권이야 조선 시대에도 그랬을 테니 패스. 하지만 이번 여름만 해도 '탈레반 피랍 사건'과 '<디 워> 논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상처 주기 바빴다. '황우석 사건'도 사실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늘 싸운다.

혹시 그게 우리가 먼저 '화'부터 내기 때문이 아닐까?

저 개소리, 정말 꼭지 도네. 찌질이들아, 너네는 머리가 나빠서 A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란다. 어쭈? 좀 배웠다고 '가르치려고' 드냐? 너는 '틀렸어.' 틀렸어. 틀렸어.

그렇게 우리는 화를 낸다. 그리고 분노는 우리의 확신을 조장한다. 생각이라는 걸 하실 줄 아는지 궁금하군요. '당연히' A가 맞는데 왜 저렇게 생각을 하지? 내 생각이 맞아. 내가 '옳아.' 옳아. 옳아.

그러니 우리는 '상대적 진실'을 접할 기회를 잃게 되고,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소모적인 말싸움을 계속한다. 내가 이만큼 상처 받았으니, 너도 이만큼 상처를 받아야 해. 함무라비 법전이 수 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우리 앞에 찬란히 부활하는 것이다. 그렇게 싸움은 계속된다.

아니,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다른 생각'의 가치를 말이다. 하지만 일단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니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분노는 확신을 조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귀머거리가 되고, 봉사가 된다.

그래서 오늘도 고민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제대로 화내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방법을 터득하는 법이야 말로 '잘 익은 와인처럼' 성숙해 가는 삶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분명 다른 생각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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