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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테트리스'를 기대하며

• 지난해 이맘 때 즈음 사회부 사건팀 소속 동기가 말했다. "아이템 좀 줘."


나는 호기롭게 답했다. "테트리스가 세상에 나온 지 25주년이야."


동기가 답했다. "그거 괜찮은데. 그런데 그걸 어떻게 얘기되게 만들지?"


"글쎄다. 그건 네가 할 일이지."


한 번 떠나간 기획 아이템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


나는 블로그에 구글 로고를 패러디 한 그림을 혼자 올려 테트리스 25주년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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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은 '테트리스가 26살이 됐으니 기사를 써달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신문사 밥을 먹는다는 건 '5의 배수'가 갖는 매력을 배우는 것이니까 말이다.



• 처음 테트리스라는 세계에 빠진 건 여섯 살 때였다.


'갤러그'가 전부인 줄만 알았던 오락실에 테트리스가 등장했다. 알록달록한 블록이 화면 위에서 떨어지는데 처음에는 그 의미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형 하나가 멋들어지게 사각형을 채워 한 줄 한 줄 비우는 걸 보고 난 뒤 나는 금세 테트리스에 빠져 들었다.


집에 MSX 컴퓨터가 제일 처음 생겼을 때도 테트리스를 실컷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다. GW-Basic으로 시작한 컴퓨터 공부가 Q-Basic, Turbo C로 이어질 때도 늘 목표는 '테트리스 짜기'였다.


학창 시절 각종 글쓰기 과제를 하려고 '아래아 한글'을 켰다가 시작한 테트리스에 발목이 잡히기도 여러 번. 휴대전화를 바꿀 때마다 제일 처음 받는 게임도 테트리스였다. 아이폰을 샀을 때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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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대단한 '실력자'는 못 된다. 대학 시절 과방 컴퓨터로 즐기던 '대전(對戰) 테트리스' 승률은 늘 그냥 그랬고, 한게임에서 높은 레벨에 오른 기억도 없다.


그냥 테트리스를 즐기는 시간이 마냥 즐거웠을 뿐이다. 공자 선생님도 말씀하셨다. 아는 건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건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 사람마다 테트리스를 즐기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줄이 생기는 걸 싫어한다.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도형이 나오면 그때마다 자리를 채워 칸을 없앤다.


반대로 나 같은 맨 왼쪽이나 오른쪽 한 줄을 비우고 모양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면 긴 일자가 나올 때 한꺼번에 넉 줄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이쪽이 점수도 높다. (한 번에 넉 줄을 없애는 게 테트리스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다 보면 빈 구멍을 더 많이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거다. 낮은 레벨에서 속도가 느릴 때는 이게 별 문제가 안 된다. 다음 도형으로 구멍을 채울 수도 있다. 그러나 레벨이 올라가면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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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후회하기 시작한다. '쟤를 여기에 두지 말고 저기에 두었다면 지금 이 도형을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냥 처음부터 한 줄 한 줄 없애고 말 걸' 하고 말이다. 그래도 소용없다. 다음 도형을 받으려면 이 도형을 어딘가에 박아두어야 한다.


게다가 많은 테트리스 게임은 레벨이 올라가면 각종 훼방을 놓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다. 아래에서 갑자기 없던 한 줄이 생기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위치에 이상하게 생긴 도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새 게임을 시작할 때 자신만만했던 태도는 사라진다. 어렵다. 점점 끝이 보인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테트리스만 고집하던 버릇도 사라진다. 한 줄 한 줄을 지우기 급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게임을 다시 시작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언젠가 실수를 깨닫게 마련이고, 실수한 걸 알면서도 더 나쁜 실수도 저지른다. 지난 번 게임에 저지른 실수는 물론 이번에 저 아래서 저질렀던 실수도 잊은 지 오래다.


그렇게 게임이 끝나간다. 막바지에 다다르면 어떤 이는 가만히 도형이 내려오는 걸 지켜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일부러 도형을 빨리 내려 일찍 판을 접기도 한다.


분명한 건 그렇게 우리는 모두 '패배자'가 되고 나서야 테트리스 게임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 이 세상 모든 게 그렇듯 테트리스는 인생을 닮은 구석이 많다.


게임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고 대담한 전략을 쓰다가 난관을 마주하면서 보수적인 전략을 펴는 것만으로도 그렇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테트리스를 인생과 비유하고 싶지는 않다.


가장 확실하게 다른 한 가지 때문이다.


테트리스는 적어도 다음에 어떤 도형이 나올지 미리 알려주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내가 테트리스를 즐기는 이유는 그것 때문인지 모르겠다. 예측 가능성 말이다.


신문사 밥을 먹는다는 건 예측하지 못한 일로 경쟁지에 물을 먹이고 먹는 일이니까.



• 글을 시작하면서 무엇인가 대단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착각했지만 역시나 별 알맹이 없는 글로 끝이 났다. 이것도 테트리스와 닮았다면 억지일 것이다.


어쩌면 테트리스 25주년에도 기사를 만들지 못한 이유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나와 비슷한 세대라면 모두가 테트리스에 대해 할 말이 한 두 마디는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특별한 걸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부탁하건대 사건팀이여 4년 후에는 부족한 글 솜씨로 쓰지 못한 이야기를 그대들 펜으로 멋들어지게 들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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