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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을 읽읍시다 #104 신문소설작가의 비애


옛날 신문을 읽읍시다 #104 고등학교 문학 수업을 들으신 분이라면 '자유부인' 논쟁을 알고 계실 터. 이 소설을 쓴 정비석 선생은 50년 전 어제오늘 동아일보에 '신문소설작가의 비애'라는 글을 실었다. 문학평론가 백철 씨가 같은 신문에 실은 '신문과 신문소설(  )'에 대한 반박문 형태.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신문이란 날마다 수십만 부씩 발간되는 간행물인 데다가 실지독자수효는 그보다도 훨씬 많아서 100만이 넘을지도 모르는데, 그처럼 방대한 수효의 독자들을 보유한 신문지상에 날마다 독자들의 주목을 받아가면서 발표해야 하는 것이 신문 소설이다. (중략)

신문소설에 대한 비난이란 왕왕히 군맹상평(群盲象評·장님 코끼리 만지기)과 같기에, 나는 그와 같은 비난성(非難聲)은 신문 소설 작가가 숙명적으로 지니고 있는 피치 못할 액운으로 알고 침묵 일관으로 감수해 오고 있다. (중략)

나는 그 소설(자유부인)을 집필하는 동안에 모 여성단체의 고발로 시경에 문초도 받았고, 치안국에 호출되어 취조도 당하였고, 심지어 공산 진영에서 막대한 공작금을 받고 소설로 남한의 정체를 뒤집어엎을 음모를 하고 있다는 혐의로 특무대(特務隊)의 내사까지 당하였었다. (중략)

그러나 오늘날 지내놓고 보면 소설 '자유부인'은 과연 그렇게도 비난을 받아야 할 작품이었던가. 그것은 안전(眼前·눈앞)의 현실을 토대로 하고 그 현실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회상을 묘파(描破·남김없이 밝혀 그림)한데 불과하지 않았던가. (중략)

삼림 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만을 붙잡고 시비를 하기로 마련이면 평론은 이미 성립되지 않는다. 원칙론을 내세우고 도학자(道學者)적인 대성질타를 하기는 쉬워도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든가. 신문 소설 작가의 숙명적인 비애는 언제나 해소될는지 자못 비량(悲凉)한 바 없지 않다."

어찌 신문 소설만 그러랴.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어디부터 '반사'라고 외쳐야 하는지 헷갈리는 건 어떤 비판이든 사실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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