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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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잇오프(Set it off)

기억이 맞다면, 아마 MBC <명화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것 같다. 그리고 그 프로를 통해 접한 많은 영화들처럼 무방비 상태인 내게 찾아 왔다가, 또 그렇게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한 동안 사라졌었다. <셋 잇 오프> 사실 그리 기억하기 쉬운 이름도 못 되지 않는가?

그러다 다시 이 영화가 나를 찾아온 건 동생 때문이었다. 늦은 새벽 케이블에서 영화를 보던 동생이 담배를 빌리러 들어와 괜찮은 영화 한 편을 봤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적의 인터뷰. 한 인터뷰에서 추천 영화로 이적 역시 이 영화를 꼽았다. 이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기억하고 있던 전부였다.

그리고 어제 새벽 무엇이 아쉬웠는지 <셋 잇 오프>는 기어이 나를 한 번 더 찾아오고야 말았다. <거침없이 하이킥>도 다 봤고, <황금어장>도 한 주 쉬었기에 아무 것도 볼 게 남아 있지 않던 새벽이었다. 그러니까 더블헤더 1차전이 끝나고 2차전이 열리기까지의 그 빈틈을 노린 셈이다.

하필이면 <하나포스> 무료 상영관에도 그다지 볼 만한 영화가 남아 있지 않았다. <화씨 911>은 이미 그리 유쾌하지 못한 추억을 가진 영화가 됐고, 이정이 왜 영화를 찍었는지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웃의 아내를 탐하고 싶은 생각 역시 조금도 없었으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악수를 건네는 심정으로 영화를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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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명화극장>인 까닭이었겠지만, 확실히 느낌이 전혀 달랐다. '무엇이 우리를 막장으로 치닫게 하는가?' 이 물음을 너무도 상투적인 방법으로 물어서 오히려 답을 하기가 망설여지는 플롯이라고 할까? 대답 역시 지나치게 상투적이라 오히려 감동적이다. 그러니까 역시나 뻔한 결말을 좋아하는 내게 맞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그 담배 연기, 그 분위기는 정말 괜찮았다. 이제는 수식어구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려서 아쉬울 정도로 괜찮았다. 혹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을 사정(射精)에서 흡연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도 될까?

그런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금연을 했다가 다시 담배가 피우고 싶어질 때, 그때 다시 이 영화를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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