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대만 중화텔레비전(CTS)에서 만든 연속극 '포청천(包靑天)'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 진자오췬(金超郡) 씨. 그 뒤로 보이는 명경고현(明鏡高懸)은 문자 그대로 '밝은 거울을 높게 걸었다'는 뜻으로 사리에 밝거나 판결이 공정할 때 쓰는 말입니다.
'판관 포청천'을 가장 잘 대표하는 대사를 꼽으라면 "개작두를 대령하라"일 터. 이 개작두는 생각보다 귀한 물건이고, 포청천은 시대를 앞서간 '패셔니스타'였는지 모릅니다.
포청천은 송(宋)나라 때 '카이펑(開封·개봉)부윤'을 지낸 포증(包拯·999~1062)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이 분 호(號)가 청천(靑天)입니다. 카이펑은 당시 수도였고, 부윤(府尹)은 부(府) 지방관. 그러니까 포증은 서울고등검찰청장 겸 서울고등법원장 겸 서울시장(사또)이었던 셈입니다.
송나라 인종(仁宗)은 1056년 그를 카이펑부윤으로 임명하면서 그 유명한 작두 세 개(용작두, 호작두, 개작두)를 하사했습니다. 용(龍)작두는 황족이나 왕족, 호(虎)작두는 관리와 귀족, 개(狗)작두는 평민과 천민을 사형할 때 쓰는 용도였습니다. 지금도 카이펑에 이 작두 세 개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사진 참조).
작두는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자를 때 쓰는 물건. 그렇다면 당시 송나라에서는 이들을 사형에 처할 때 어느 신체 부위를 잘랐을까요?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참으로 끔찍하게도 '허리'가 정답입니다. 작두를 써서 사형에 처하는 형벌을 '요참형(腰斬刑·심장이 약하신 분은 링크를 누르시지 않는 편이 좋을 수 있습니다)'이라고 합니다. 이때 요(腰)는 허리띠를 '요대(腰帶)'라고 할 때 쓰는 글자. 참(斬)은 '베어 죽인다'는 뜻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馬謖·190~228)을 베어 죽였다는 '읍참마속(泣斬馬謖)'에도 이 글자가 들어갑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끔찍한 방식으로 죽여야 했을까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고통스럽게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잘못이 큰 사람일수록 이렇게 목숨이 끊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안기는 사형법을 선호(?)했습니다. 역시 벨 참(斬)이 들어가는 능지처참은(陵遲處斬)은 언덕(陵)을 올라가듯이 천천히(遲) 죽인다는 뜻입니다. 요참형을 당한 사람은 대부분 즉사하지만 출혈성 쇼크가 오기 전까지 숨이 붙어 있는 케이스도 없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이 끔찍한 처형법을 청(淸)나라 시절인 1734년까지 유지했습니다.
이 작두는 사형 도구였지만 황제가 하사한 물건이기 때문에 개작두라고 해도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개작두가 필요할 때 등장하는 대사가 바로 '狗頭䥷伺候'였습니다. '狗頭䥷'는 그냥 개작두라는 뜻 그 자체입니다. 중요한 건 '모시다'는 뜻인 '伺候'입니다.
한국어에서 '대령(待令)하다'는 말하는 사람을 높이는 말. 거꾸로 중국어는 물건 자체를 높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 말을 원래 뉘앙스에 가깝게 번역하면 '개작두를 모시고 오거라'에 가깝습니다. 현재 伺候는 표준 중국어에서 잘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포청천은 중국어로 '개작두를 대령하라'가 아니라 '개작두를 모시고 오거라(狗頭䥷伺候)'에 가깝게 말했습니다.
참고로 사약 역시 임금이 내려준 약이라는 뜻이기에 죽을 사(死)가 아니라 줄 사(賜)를 넣어 '賜藥'이라고 씁니다.
그렇다면 숨이 멎는 순간에도 '내 장례 때는 비싼 향(香)을 쓰지 말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청백리였던 포청천이 패셔니스타였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정답은 '선글라스' 때문입니다. 네, 제대로 읽으셨습니다. 선글라스 맞습니다.
잠깐 'B급 세계사: 알고 나면 꼭 써먹고 싶어지는 역사 잡학 사전'에서 인용하면:
TV 드라마에서 포청천은 안경을 쓰지 않았다. 어쩌면 이 점은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 11세기 이후 송의 판관은 재판할 때 색안경을 자주 썼기 때문이다. 엄숙한 법정에서 색안경이라니? 물론 이유가 있다. 신문 중인 죄인에게 눈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다. 눈동자의 흔들림만으로 판관의 마음이 노출될 수 있잖은가. 오늘날의 선글라스와 많이 다르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 색안경이 선글라스의 기원이다.
(중략)
투명한 유리 말고도 안경의 재료는 많다 … 연수정은 그을에 그을린 듯한 빛을 띈다. 그래서 이름도 연수정(煙水晶·Smoky Quartz)이다. 이 연수정을 이용해 송의 재판관들은 색안경을 만들어 착용했다.
이 책을 쓴 김상훈 작가가 이 이론을 처음 펼친 건 아닙니다. 안경사(史) 전문 작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카 아체렌자가 1997년 펴낸 책 '아이웨어(Eyewear)'에도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포청천 역시 선글라스를 끼운 채로 재판을 진행했을 확률이 적지 않은 겁니다.
아, 포청천 얼굴 빛이 실제로 어땠는지는 의견이 엇갈립니다. 한 쪽에서는 포흑자(包黑子), 포흑탄(包黑炭) 같은 별칭을 토대로 연속극에서처럼 얼굴이 검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다른 쪽에서는 '포서원기(包書院記)'를 토대로 "점잖고 단정한 모습으로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마에 있는 초승달 모양 흉터을 두고는 '실제로는 없었다'는 데 별 이견이 없는 상황입니다.)
요즘에도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포청천을 방영하는 채널이 눈에 띌 때도 가끔 있습니다. 그럴 때 잘난 척 하시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올려 봅니다. '돌아왔다'는 뜻인 Redux를 제목에 붙인 건 2012년 비슷한 내용으로 아주 짧은 글을 올린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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