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드디어 '네가 가라 하와이' 카드를 꺼냈습니다. 자기네 나라가 아니라 호주가 국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겁니다. 지금까지 두 나라는 자칭타칭 '(쌍둥이) 형제 사이'에 가까웠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윈스턴 피터스 뉴질랜드 총리 대행(73)은 24일 국영방송 TVNZ에 출연해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한 국기를 호주가 베꼈다"며 "호주는 실제로 국기 디자인을 바꿔야 하고, 우리가 먼저 이 디자인을 사용했다는 점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원래 뉴질랜드 정부 대표는 저신다 아던 총리(38)지만 6월 21일 딸을 낳으면서 6주간 출산 휴가를 얻었습니다. 이후 피터스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이 총리 대행을 맡고 있습니다. 아던 총리는 노동당, 피터스는 '뉴질랜드 제일당'(NZ First) 대표로 현재 연립 정부를 꾸린 상태입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그가 총리 대행 신분으로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꺼낸 게 '월권' 논란을 빚을 수 있는 건 사실. 그렇다고 아주 완벽히 틀린 이야기를 한 건 아닙니다.
호주에서 뉴질랜드 국기를 베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두 나라 국기 디자인이 아주 비슷한 건 사실입니다. 그림 한 장에 겹쳐 보면 남십자자리를 상징하는 별 네 개는 위치도 거의 똑같습니다.
이렇게 국기가 비슷하다 보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카누 슬라럼(K-1) 메달 수여식 때는 각각 2등, 3등이었던 뉴질랜드와 호주 국기를 뒤바꿔 올리기도 했습니다.
I think the @Olympics put the wrong flag on the 2nd placed pole...could be wrong. But that's what it looked like pic.twitter.com/daNnEiPvTz
— Andrew Mulligan (@Andrew_Mulligan) 2016년 8월 11일
뉴질랜드가 현재 국기 디자인을 '공식적으로' 먼저 쓴 것도 맞습니다. 뉴질랜드는 1902년 의회 비준을 거쳐 현재 국기를 사용했습니다. 호주에서 같은 일이 일어난 건 1954년이었습니다. (물론 호주에서는 1954년에는 법을 제정한 것일 뿐 1901년 9월 3일부터 이 국기를 썼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호주에서 해마다 이날은 국기의 날·Flag Day입니다.)
이전까지 뉴질랜드에서는 '(디자인) 원조 논쟁'보다는 국기 교체 문제가 더 논란이었습니다. 뉴질랜드 내부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국기 디자인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때는 호주 국기와 디자인이 비슷한 것보다 영국 왕실 상징인 '유니언 잭'(사진)이 들어 있는 게 더 문제였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처음 국기를 만들 때는 유니언 잭이 들어가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1907년까지 뉴질랜드는 영국령 그러니까 영국 식민지였으니까요. 그러다가 이해 자치령(dominion)이 됐습니다. 1935년에는 독립 선언을 했고 '영국 해외 자치령을 영국 본국과 평등한 공동체로 규정한다'는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1947년 의회에서 비준하면서 뉴질랜드는 실질적인 독립국이 됐습니다. 계속해 1986년에는 '뉴질랜드 헌법(Constitution Act 1986)'을 제정하면서 명실상부한 독립국이 됐습니다.
그러니 '국기 디자인에서 유니언 잭을 빼자'는 목소리가 들린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반세기 동안 논란이 이어진 끝에 2014년 존 키 당시 뉴질랜드 총리(57·국민당)는 "새 국기 채택 여부에 대해 국민 투표를 시행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실제로 2015, 2016년 국민 투표를 진행했습니다.
우편으로 진행한 이 투표는 1차 투표에서는 새 국기 디자인 다섯 가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고, 2차 투표에서는 1차에서 뽑은 디자인과 현재 디자인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차 투표 결과 카일 락우드 씨(41)가 제안한 '은고사리(Silver Fern)' 디자인(사진)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정확하게는 후보 다섯 가지 가운데 3개에 '퐁가라'라고도 부르는 은고사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이 디자인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 우리나라에 태극 문양이 그런 것처럼 이 은고사리 문양도 뉴질랜드 상징입니다.)
단, 2차 투표에서는 현재 디자인이 낫다는 의견이 56.7%로 더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 국기를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정당 사이에도 국기 교체에 대한 의견이 갈렸습니다. 당시 여당이던 국민당은 당연히 바꾸자는 게 당론이었고, 피터스 현 총리 대행이 이끄는 제일당은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맞섰습니다. 그는 2차 투표 기간 중 "우리는 새로운 국기를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론에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과 마찬가지로 "국기를 바꿔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호주"라고 주장했습니다.
One argument used against our flag is that it is too like Australia's, which borrowed our design in the first place. However, since Australian political leaders have recently signed to have their own head of state it is Australia that will have to change its flag, and soon. That will rightly restore our flag to being unique as it was in the beginning.
이때만 해도 투표가 진행 중이니 이런 발언 정도는 '정치용 수사'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총리 대행 자격으로 발언을 했으니 무게감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발언이 사실 그저 국기 디자인 때문에 생긴 일만은 아닌 겁니다.
우리가 한일관계를 통해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이웃 나라끼리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게 '기본 옵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쓰는 브라질에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만 (옆 나라 아르헨티나 공용어인) 스페인어를 썼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뉴질랜드-호주는 참 특이한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특이하냐면 뉴질랜드는 2001년 공군에서 보유하고 있던 A-4 스카이호크(사진) 전투기 34대 모두 퇴역시키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 뉴질랜드 공군에는 '복무 중인' 전투기가 한 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체는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팔면 되지만 조종사 앞길은 어떻게 보장했을까요? 정답은 '호주(일부는 영국) 공군으로 보낸다'였습니다.
한국이 공군 전투기를 모두 없애기로 하고, 전투기 조종사는 일본 자위대에서 근무하도록 한다는 건 가정조차 불가능한 일. 그런데 뉴질랜드와 호주는 정말 이렇게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만큼 두 나라 사이에 믿음이 두터웠던 것. 실제로 뉴질랜드와 호주는 제1, 2차 세계대전 등에 'ANZAC(the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참전했으며 2006년부터는 ANZAC 전투군(ANZAC Battle Group)이라는 부대를 공동 편성하고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만 이렇게 가까운 게 아닙니다. '태즈먼해를 오가는 이동에 관한 합의(Trans-Tasman Travel Arrangement)'에 따라 두 나라는 상대 나라 국민에게 무비자 입국은 물론 거주, 학업, 노동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태즈먼해는 뉴질랜드와 호주 사이에 있는 바다 이름입니다.)
이에 따라 호주 국민은 뉴질랜드에 입국하면 자동으로 '거주 비자(Resident Visa)'를 받을 수 있습니다(사진). 이 비자 소지자는 뉴질랜드 영주권 소지자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뉴질랜드 국민이 호주에 입국할 때도 '444 특별 비자(Special Category Visa)'를 발급받으며, 호주 영주권 소지자와 거의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원래 뉴질랜드 국민도 호주 입국과 동시에 영주권을 발급받았지만 '호주 → 뉴질랜드'보다 '뉴질랜드 → 호주' 쪽 쏠림 현상이 나타나면서 2001년부터 제도를 손질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나라 사람 모두 마음만 내키면 서로 상대 나라에 가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며, 정부에서 주택 임대 보조비를 받아 살 집을 찾을 수 있고, 자식은 (공립 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무료로 교육할 수 있습니다. 또 대학에서도 상대 나라 학생은 유학생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아플 때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당연한 일.
이 정도면 '형제 나라'가 아니라 아예 한 나라 안에 다른 주(州)가 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요? 두 나라가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이유는 뭘까요?
호주는 뉴질랜드보다 6년 빠른 1901년 자치령이 됐습니다. 호주 대륙에 있던 영국 식민지가 뜻을 모아 호주 연방을 결성하는 형태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1900년 '호주 연방 헌법(Commonwealth of Australia Constitution Act)'을 제정했는데 그중 6조는 이렇습니다.
The Commonwealth shall mean the Commonwealth of Australia as established under this Act.
The States shall mean such of the colonies of New South Wales, New Zealand , Queensland, Tasmania, Victoria, Western Australia, and South Australia, including the northern territory of South Australia, as for the time being are parts of the Commonwealth, and such colonies or territories as may be admitted into or established by the Commonwealth as States; and each of such parts of the Commonwealth shall be called a State.
Original States shall mean such States as are parts of the Commonwealth at its establishment.
네, 그렇습니다. 호주 연방을 만든 이들은 뉴질랜드가 이 연방에 참가하기를 바랐습니다. 영국에서는 원래 뉴질랜드를 뉴 사우스 웨일스 지방 부속 도서로 취급했거든요. 물론 뉴질랜드는 이를 거부하고 별도로 자치령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따로 자치령을 세운 뒤로도 두 나라는 1908년 런던,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때 '오스트랄라시아'라는 이름으로 공동 선수단을 파견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 왔습니다. 여기에 ANZAC을 통해 문자 그대로 피를 나누었으니 이웃 나라면서도 형제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던 겁니다.
아, 호주 헌법은 현재도 유효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럴 확률은 희박하지만) 뉴질랜드가 원하기만 한다면 호주 연방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두 나라 사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피터스 총리 대행(누군지 기억하시죠?)이 시발탄을 쏜 것도 아닙니다. 이미 앤드루 리틀 뉴질랜드 법무부 장관(53)과 피터 더튼 호주 내무부 장관(48·사진) 사이에 설전 오간 다음 저 발언이 나온 겁니다.
사건은 2014년 호주에서 이민법을 개정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호주는 징역 1년 이상을 선고받을 수 있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람은 실제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아도 국외로 추방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쳤습니다. 이후 2015년부터 현재까지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추방당한 사람이 1200명을 넘어섰습니다.
뉴질랜드로서는 2001년 특별 비자(뭔지 기억하시죠?) 도입으로 자존심이 상한 상태에서 호주에 또 한 방 먹었다고 생각한 것. 2002년부터 2011년까지 호주 시민권을 신청한 뉴질랜드 국민 14만6000여 명 가운데서 시민권 획득에 성공한 건 8.4%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뉴질랜드 법무부 장관이 "호주는 우리 친구 또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 아닌 것 같다"고 인터뷰했고, 호주 내무부 장관이 "우리가 뉴질랜드를 위해 해주는 일이 많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받아치면서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겁니다.
호주에서 이렇게 뉴질랜드 국민을 꺼리게 된 건 '신분 세탁 우려' 때문입니다. 이를 바로 보여주는 게 마누스섬 난민 수용소 문제였습니다.
호주는 2013년부터 파푸아뉴기니에 있는 이 섬에 '선상 난민(Boat People)'이 머무는 난민 수용소(사진)를 운영했습니다. 자국 안에 받을 수는 없으니 '역외(域外) 수용소'를 마련했던 것. 그러다 2016년 파푸아뉴기니 대법원에서 "호주 망명 희망자들을 우리나라에 억류하는 건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이 수용소를 폐쇄하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에도 난민 600여 명은 '갈 곳이 없다'며 수용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던 뉴질랜드 총리(사진·누군지 기억하시죠?)가 "이 가운데 150명을 우리가 받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에 대한 호주 정부 대답은 '노(No)'였습니다. 이들이 뉴질랜드 시민권을 받으면 다시 호주로 들어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뉴질랜드와 호주가 너무 가까우니 뉴질랜드를 '뒷문'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호주 정부가 이렇게 걱정하는 건 기본적으로 호주 사람들이 이민자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 영국에 뿌리를 둔 '가디언' 국제판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호주 인구 가운데 54%는 (이민자 증가에 따른) 호주 인구 증가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5년 전에 똑같이 응답한 비율은 45%였습니다.
두 나라 사이가 최근 팽팽한 갈등을 이어오고 있는 이유로 '두 정부가 서로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뉴질랜드는 진보적인 노동당, 호주는 보수적인 자유당이 집권하면서 두 나라 사이가 벌어졌다는 겁니다.
아예 호주 노동당이 정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뉴질랜드 노동당에서 호주 정부 흔들기에 나섰다고 의심하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입니다. (이것부터 두 나라가 얼마나 가까운지 알려주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반면 아예 두 나라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두 나라 사이를 오랫동안 연구한 존 와너 호주 국립대 교수(64)는 "장기적인 전환기에 접어들었다고 봐야 한다. 20년 안에 뉴질랜드는 (호주에)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나라가 될 것"이라며 "뉴질랜드는 점점 특별하지 않은 나라가 될 거고 호주도 뉴질랜드를 다른 나라와 똑같이 대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역시 서로 다른 국경을 쓰는 나라끼리는 언젠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를 외칠 수밖에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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