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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은 언제 어떻게 우리 곁으로 왔을까


2018년 중복입니다. 이제 복날 대표 음식을 꼽으라면 아마 제일 많은 분이 제 사랑 보신탕이 아니라 삼계탕을 꼽으실 터. 그러면 삼계탕은 언제 어떻게 우리 곁으로 왔을까요? 사실 삼계탕은 삽겹살이 그런 것처럼 생각보다 그렇게 역사가 긴 음식은 아닙니다. 


이번에도 근거는 신문 기사입니다. 감자탕이나 닭도리탕 때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흔히 먹는 음식은 신문 기사 어디엔가 남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설렁탕은 1922년부터 꾸준히 신문 기사에 등장합니다. 반면 삼계탕은 1963년에 한번 나타났다가 10년이 지난 다음에야 다시 기사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맞습니다. 예전에는 계삼탕(鷄蔘湯)이라는 말도 썼습니다. 1987년에 동아제약에서는 이런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흔히 알고있는 것과 달리 蔘鷄湯(삼계탕)의 본래 이름은 鷄蔘湯(계삼탕)입니다.

柳得恭(유득공)의 京都雜志(경도잡지), 金邁淳(김매순)의 洌陽歲時記(열양세시기), 洪錫謨(홍석모)의 東國歲時記(동국세시기) 등에는 계삼탕에 대한 기록이 두루 나타나 있읍니다.

또한 우리말 사전에도 '어린 햇닭의 내장을 빼고 인삼을 넣고 곤 본약'이라고 계삼탕에 대해 풀이하고 있으나, 삼계탕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읍니다.

그러던 계삼탕이 삼계탕으로 바뀌게 된 것은 6·25동란 이후부터입니다.

본래 양반계급의 음식인지라 대중성이 없었던 계삼탕이 대중음식점에서 음식으로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삼계탕이라 잘못 불리워졌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땀을 많이 흘려 몸이 허허질때 계삼탕을 먹으면 사흘동안 보신이 된다고 합니다. 영계와 인삼, 대추가 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허허진 몸에 원기를 되찾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닭을 재료로 하는 계삼탕엔 잔뼈가 많으므로 먹는 법이 좀 까다롭습니다.

먼저 고기를 건져 별도의 그릇에 담아 고기에 붙어있는 잔뼈를 추려가면서 먹습니다. 나중에 국물을 먹는데, 찹쌀을 그대로 먹거나 밥을 말아 먹으면 됩니다.

이러한 계삼탕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고유의 민족음식입니다.


계삼탕이라는 표현이 신문 기사에 처음 등장한 건 1956년으로 삼계탕보다 빠르지만 삼계탕보다 인기 있는 표현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1987년에 갑자기 계삼탕 검색 결과가 많이 나온 게 바로 위에 있는 광고 때문입니다.)



계삼탕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1956년 12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계삼탕이란 닭을 잡아 털을 뽑고 배를 따서 창자를 (꺼)낸 뒤 그 속에 인삼과 찹쌀 한 홉, 대추 4, 5개를 넣어서 푹 고아서 그 국물을 먹는 것"이라고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계삼탕은 설명이 필요한 음식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기를 푹 고아서 먹는 건 일반적인 조리 형태고, 닭 역시 (꿩보다는 덜 해도) 흔한 먹거리였다는 걸 감안하면 삼계탕을 먹기 시작한 게 이렇게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이때 키워드는 바로 '(인)삼'입니다. 인삼을 넣어 먹지 않았을 뿐 닭고기를 고아(쪄) 먹는 요리는 동아제약 광고에 나온 것처럼 예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1670년 세상에 나온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등장하는 수증계(水蒸鷄 또는 水烝鷄)가 대표 사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음식디미방에 나온 수증계 조리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살찐 암탉을 (털을) 모두 뜯고 마디를 끊고 엉치와 앞가슴을 많이 두드린다. 노구를 달궈서 기름을 반 종지쯤 치고 그 고기를 집어넣고 익게 볶고 맹물을 가득히 붓고 장작 집피어 끓이되 토란알 한 되와 순무적 모같이 썰어서 한데 넣고 계속하여 삶는다. 그 고기가 다 무르거든 고기와 나물을 건지고 그 국물에 간장으로 간 맞추어 고기를 도로 넣고 한소끔 끓여 내장 냄새가 없어지면 밀가루 두 국자쯤 푼다. 늙은 동아적모 길이만큼 외도 길쭉길쭉 썰어 넣어 잔파와 염교를 한 줌씩 곁곁이 묶어 넣어 가루끼와 나물이 익을 만하거든 넓은 대접에 잡채 벌리듯 나물과 고기를 곁곁이 놓고 국물을 떠 붓고 그 위에 계란 부쳐서 잘게 썰고 생강과 후춧가루 등을 뿌려 쓴다.


그러니까 조리 과정 어디에도 인삼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증계는 사진으로 확인하실 수 있는 것처럼 탕으로 분류하기는 어렵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도 수증계를 '닭백숙'이라고 풀이합니다. 


대신 연계탕(軟鷄湯)[각주:1] 총계탕(葱雞湯) 황계탕(黃鷄湯) 같은 '닭탕' 요리가 조선 시대 기록에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총계탕에서 총(葱)은 '파'라는 뜻. 그러니까 인삼을 넣고 끓인 닭탕이 삼계탕이듯 파를 넣고 끓인 닭탕이 총계탕인 겁니다. 황계탕도 한약재인 황기가 들어가 그렇게 부른다고 풀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삼과 닭을 함께 끓였다는 뜻에서 삼계(蔘鷄)라고 쓴 표현은 개화파 김윤식(1835~1922)이 쓴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때는 삼계 뒤에 붙은 글자가 탕이 아니라 고(膏)였습니다. 이 膏는 '기름 고'라는 글자로 바셀린 같은 걸 '연고(軟膏)'라고 부를 때도 씁니다. 이 삼계고는 인삼과 닭을 푹 고아서 기름처럼 만든 약이었던 셈입니다. 이 삼계고는 한의학자 이제마(1837~1900)가 쓴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도 설사병 치료제로 등장합니다.


'삼계탕'이라는 표현이 문서에 처음 등장한 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쓴 '중추원(中樞院) 조사자료'입니다. 중추원은 조선 총독 자문 기관으로 당시 조선의 관습 및 제도를 조사하는 기능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조사한 결과를 문서로 남긴 게 바로 '중추원 조사자료'입니다.


삼계탕은 이 조사사료 중에서 다이쇼(大正) 13년(1924년)에 펴낸 보고서 '雜記(잡기) 및 雜資料(잡자료)' 가운데 '年中行事(연중행사)' 항목에 처음 등장합니다(사진).


여름 3개월간 매일 삼계탕, 즉 인삼을 암탉의 배에 넣어 인삼을 우려낸 액을 정력약으로 마시는데, 중류(中流·중산층) 이상에서 마시는 사람이 많다.


동의수세보원을 완성한 게 1894년이니까 30년 만에 삼계탕이 설사약에서 정력제로 바뀐 셈입니다. 사실 이 사이에 이미 닭에 인삼을 넣는 '요리'도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름이 삼계탕이나 계삼탕이 아니었을 뿐이죠. 이 요리 그림은 '닭국'이었습니다.


1917년판 '조선요리제법'은 다음과 같이 닭국 요리법을 소개합니다.


닭을 잡아 내장을 빼고 발과 날개 끝과 대가리를 잘라버리고 뱃속에 찹쌀 세 숟가락과 인삼 가루 한 숟가락을 넣고 쏟아지지 않게 잡아맨 후에 물을 열 보시기쯤 붓고 끓이나니라.


다만, 이때도 닭 배 속에 지금처럼 생 인삼, 즉 수삼(水蔘)을 넣는 게 아니라 인삼 가루를 넣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당시에는 수삼을 운반하고 (냉장) 보관하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 수삼보다는 인삼 가루를 쓰는 게 더 편했을 겁니다.


이후 역사는 동아제약 광고에 나오는 대로입니다. 삼계탕을 만들어 파는 식당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인은 삼계탕과 사랑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닭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도 삼계탕은 우리가 먹기 시작한 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음식입니다.

  1. 이 연계가 나중에 '영계'로 바뀝니다. '연' 마지막인 /n/ 소리와 '계'를 시작하는 /g/ 소리가 만나서 /ŋ/ 소리로 바뀐 것. 그래서 영계에서 영은 한자가 없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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