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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망종(芒種) 때문에 현충일이 6월 6일일까


사실 24절기 중 9번째인 망종(芒種) 때문에 현충일이 6월 6일이 됐다고 알고 계시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잠시 아시아경제 '[그날의 유래]현충일은 왜 항상 망종(芒種)과 겹칠까?'를 읽어 보겠습니다.


현충일과 망종이 겹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고 가까이 6.25 전쟁의 상흔이 남은 달이니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실제로 현충일이 망종과 겹치게 된 것은 1000년 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고려 현종 5년인 1014년, 당시 거란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장병들이 사망한 뒤 전몰장병들의 유해를 집으로 돌려보내 제사를 지냈던 것이 망종일이었다고 한다. 이후 나라를 위해 죽은 장병들의 제사를 이 시기에 주로 했으며 해방 이후 기념일에 포함됐다.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가 틀렸습니다. 


하나는 "이후 나라를 위해 죽은 장병들의 제사를 이 시기에 주로 했(다)"는 것.


2003년 지영임 당시 일본 히로시마(廣島)대 박사 후 연구원은 '비교문민속학' 25호에 게재한 논문 '顯忠日(현충일)의 創出過程(창출과정)'[각주:1]에 이렇게 썼습니다.


(망종에 제사를 행하는 옛날 풍습 때문이라는 설명을) 그대로 믿는다면 국가기념일의 선정에 있어 전통적 세시풍속을 고려했다는 것이 되며 현충일이 옛날부터 민중의 생활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세시기를 조사해 보아도 죽은 사람을 위한 제사를 6월 6일에 행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국가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과거와의 연속성을 가지는 것처럼 주장하여 새로운 전통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반복에 의해 특정의 행위와 가치와 규범을 가르치려하는 창조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지영임은 이렇게 계속 씁니다.


역사적으로 소급하여 보면, 조선시대 전사자를 포함한 無祀鬼神(무사귀신)을 모셨다고 하는 '癘祭'(여제)의 祭日(제일)은 청명, 7월 15일, 10월 1일이었다. 이 날들은 그 전부터 죽음과 관련이 있는 祭日이어서 '死者'를 모셔왔다. 만약, 현충일이 제사를 행하는 풍습에 따라 제정되었다면 상술한 세시풍속 안에서 그 유래를 찾아야 하지만, 6월 6일에 제사를 행하는 풍습이 없다고 한다면, 이 날을 현충일로 정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 앞선 기사에서 두 번째로 틀린 점을 짚고 넘어 가야 합니다. 그건 바로 "해방 이후 기념일에 포함됐다"는 것.


올해 6월 6일은 제64회 현충일입니다. 그러면 제1회는 1956년이었을 겁니다. 물론 이때도 해방(1945년) 이후는 맞지만 이렇게 11년이 지난 다음을 '해방 이후'라고 표현하는 건 보기 드문 일입니다.


첫 번째 현충일 추도식 광경을 전한 1956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1면 사진


해방 공간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한 날은 11월 17일이었습니다. 1946년 11월 17일자 동아일보는 이날 서울운동장에서 '순국선열기념식전(典)' 행사가 열린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날 순국선열을 기리기 시작한 건 임시정부 시절인 1939년부터. 하필 11월 17일을 고른 건 1905년 이날이 을사조약 체결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사실상 일본 식민지가 된 날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이날은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한 것.


광복 이후에도 이 기념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현충일의 창출과정'에서 인용하면:


순국선열의 날은 1946년부터 1961년까지는 민간단체에서, 1962년부터 1969년까지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1970년부터 1996년까지는 현충일 추념식에 포함(민간단체주관으로 행사를 거행)거행되어 왔으나, 1997년 4월 27일에 정부기념일로 제정·공포하여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중략)


순국선열의 날은 광복직후부터 한국전쟁 발발까지 김구(1946~1948), 이승만(1948)등이 참석함으로써 실질적인 정부기념일에 준하는 규모의 추모행사를 성대히 거행해왔다.


요컨대 이런 날이 이미 있었는데 정부에서는 이날을 외면하고 현충일을 따로 만든 겁니다. 왜였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김민환 한신대 교수의 석사학위 논문  '한국의 국가기념일 성립에 관한 연구'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현충일의 경우 반드시 6·25와만 관련있는 기념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어느 나라든지 건국과 관련해서 희생이 있었고, 그와 관련해서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Memorial Day(미국)'라는 명칭을 가지든 'Remembrance Day(영국)'라는 명칭을 가지든 기본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가지는 기념일이다. 한국의 경우 현충일에는 6·25때 희생된 사람들 이외에도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같이 추모되는 날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순국선열의날'이 있어 성대하게 기념되었던 것과 연관시켜 보면, 아무래도 현충일의 6·25 중심성이 확인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한국의 'Memorial Day'는 아마 순국선열의날인 11월 17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19)56년부터 (19)69년까지 정부에서 순군선열의날[각주:2]을 따로 기념해서 기념식을 거행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총무처, 1997), 이는 더욱 현충일의 6·25 중심성을 확인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현충일이 점차 순국선열의날을 흡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기억의 정치적 목적과 관련해서 이전 시기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즉, 국가 정체성과 관련하여 살펴볼 때 6·25 중심의 현충일이 독립운동 중심의 순국선열의날을 통합헤가 된 것에서 이 시기의 특징을 찾아야 한다.


네, 맞습니다. 6·25가 6월에 있었으니 현충일을 6월에 만들었을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첫 번째 현충일이던 1956년 6월 6일 동아일보는 이날을 "6·25 전란 중 국토방위의 성전에 참여하여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8만8541주의 전몰장병 영령에 대하여 생전의 위훈을 추모하고 길이 명복을 기원하는 (날)"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현충일을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는 날)'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과 다른 대목. 현재가 현충일에 추모하는 대상 범위가 더 넓습니다.


현충일 이전에는 '(육해공 3군) 전몰장병 합동 추도식'을 통해 6·25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추모했습니다. 동아일보에서 현충일 제정 소식을 처음 전한 1956년 4월 16일자 기사는 "지난 14일의 국무회의에서는 '6월 6일'을 공휴일로 하여 '현충의 날'로 제정, 거족적으로 국토수호에 바친 고인들의 거룩한 영혼을 추모키로 결정하였다한다. 이에 따라 금년에도 오는 6월 6일 영등포에 있는 '군국묘지'에서 '제5회 전몰장병 합동 추도식'을 집행하기로 되었다 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현충일 제정 소식을 전한 관보 제1536호


그렇다면 1955년에는 제4회 전몰장병 합동 추도식이 있었겠죠? 그렇다면 이 추도식은 언제 열었을까요? 정답은 4월 23일입니다. 그 전에도 △1951년 4월 7일 △1952년 9월 28일 △1953년 10월 16일에 합동 추도식을 진행했습니다.


1954년에는 11월 2일자 동아일보에 "11월 5일 국군묘지에서 거행될 예정이던 제4차 육해공군 전몰장병 합동 추도식은 제반 준비 관계로 당분간 연기키로 되었다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위에서 보신 것처럼 이 4차 추도식은 이듬해(1955년) 4월 23일이 되어서야 열렸습니다. 


결국 적어도 6·25 전쟁 이후에는 확실히 '망종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 제사를 지내는 풍습' 같은 걸 지키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풍습이 떠올라서 '망종을 현충일로 삼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을까요?


(종이)신문에 현충일이 망종과 (거의) 같은 날짜가 된 이유를 소개하는 내용이 처음 등장한 건 1998년 5월 28일자 한겨레 독자칼럼 '보훈의 달을 통일기원의 달로'였습니다.


호국영령의 위훈을 추모하는 현충일을 6월 6일로 정한 것은 정부수립 이후 가장 큰 국난인 6·25 전쟁을 상기하고, 청명(4월5일)에 사초, 한식(4월6일)에 성모에 이어 망종(6월6일)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에 맞춘 것이다.


이 글을 보낸 이는 당시 서울지방보훈청에 근무하던 김익현 씨였습니다. 현충일을 제정하고 나서 42년이 지나도록 왜 어떤 신문 기자도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필 보훈청 근무자가 처음 소개하게 됐을까요?


네, 이 글은 끝내 왜 현충일이 6월 6일인지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망종일이라 6월 6일을 현충일로 골랐을 가능성이 제로(0)인 것도 아닙니다. 단, 망종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을 기리는 전통이 있어서 이날이 현충일이 됐다는 건 '창조된 전통'에 가깝습니다.


  1. 이후 '한자(한글)' 형태는 kini註 [본문으로]
  2. '순국선열의날'의 오타인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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