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개성에서 출토한 왕건동상.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벌거벗은 모양을 담은 청동 조각상으로 머리에 황제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습니다. 동아일보DB
네, 일단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동아시아에서 '황제(皇帝)'라는 표현을 처음 쓴 건 진(秦)나라 시(始)황제(기원전 259년~기원전 210년)였습니다. 원래 중국에서 군주를 부르는 호칭은 왕(王)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왕도 주(周)나라(기원전 1046년~기원전 256년) 임금만 쓸 수 있는 표현이었지만,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를 거치면서 원래 모든 제후(諸侯)가 스스로 왕을 자처했습니다.
이에 기원전 221년 다시 중국을 통일한 진왕 영정(嬴政)은 '왕중왕'을 차저하면서 왕보다 급(級)이 높은 호칭을 원했고, 중국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한 글자씩 따와 황제라는 호칭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첫 번째 황제라는 뜻에서 시(始)황제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진나라를 시황제가 세워서 이런 이름이 붙은 건 아닙니다. 시황제는 제31대 진나라 왕입니다.)
진시황릉 인근에서 발굴한 병마용(兵馬俑). 실제 크기로 흙을 구워 다양한 사람을 표현혔습니다. 동아일보DB
이렇게 황제는 왕중왕 콘셉트로 시작한 개념이기 때문에 황제로 인정받으려면 자신을 군주로 모시는 왕이 존재해야 합니다. 황제는 주변국 최고 실력자를 왕으로 책봉(冊封)해 군신관계를 맺습니다. 이런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번국(藩國)이라고 부릅니다.
고려가 황제국이 되려면 고려 임금을 모시는 번국이 있어야겠죠?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뒤 호족(豪族) 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각 지역을 내번(內藩)으로 상정했습니다. 그리고 여진, 탐라 등을 외번으로 규정(外藩)했습니다. 여요(麗遼)전쟁에서 승리한 뒤로는 거란(요·遼)도 이 세계에 편입했습니다.
고려가 거란을 물리치는 데 앞장선 강감찬(194~1031) 동상. 서울 낙성대공원에 있습니다. 위키피디아 공용
고려가 이렇게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던 건 당시 중국에 절대 강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907년 당(唐)나라가 망하고 1271년 원(元)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 고려뿐 아니라 거란, 베트남, 여진(금·金) 등이 각자 천자(天子)를 자처했습니다. 이 와중에 금나라는 한족이 세운 송(宋)나라 황제를 책봉했고, 금나라와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송나라는 이를 받아들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자'입니다. 천자는 하늘신 상제(上帝)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고대부터 중국에서 임금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위에 '주나라 임금만 왕이라는 호칭을 쓸 수 있었다'고 썼는데 이때 임금을 천자라고 바꿔 쓸 수 있는 겁니다.
유교 경전 사서오경(四書五經) 가운데 하나인 예기(禮記)에 따르면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안 됩니다. 조선 고종(高宗·1852~1919)은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면서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光武帝)로 거듭났습니다.
현재 서울 조선호텔 내부에 있는 황궁우(皇穹宇). 이 건물은 환구단 일부로 하늘과 땅신을 모신 곳입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고려는 황제국이었으니까 당연히 임금이 하늘에 직접 제사를 올렸겠죠? 네, 그랬습니다.
그런데 조선을 건국한 후에는 "조선은 제후국에 해당하기 때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사대명분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 태일(太一)의 별 방위에 따라 제사지내는 것은 실로 온당하지 못한 것이다. 고려 때에 해동 천자(海東天子)라고 잠칭(僭稱)한 까닭으로, 중국에 조림(照臨)한 별을 망령되게 금년에는 어느 방위로 옮겼다고 이르고 곳곳에서 제사지냈는데, 천하로서 본다면 우리 나라는 하나의 나뭇잎과 같으니, 어찌 동·서·남·북을 나누어서 제사지낼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 서방이라 하여 제사지내면 우리 나라에서도 서방이라 하여 황해도에서 제사지내는 것이 옳겠는가. 너희들은 그것을 의논하여 계문(啓聞)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22년 2월 23일
이런 논리는 '고려사(高麗史)' 편찬 과정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종(1397~1450)은 고려 역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직서(直書) 원칙을 추구했습니다. 직서는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쓴다'는 뜻. 세종이 이 원칙을 추구한 건 임금이 죽은 다음에 붙이는 묘호(廟號)를 황제 스타일인 조(祖) 또는 종(宗)으로 칭할 수 있도록 역사적 선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려·조선 시대 임금을 태조, 세종 등으로 부르는 게 묘호입니다.)
그러나 모든 편찬자가 이 원칙을 고수했던 건 아닙니다.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가 펴낸 책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사료적 특성'에 따르면 정도전(1342~1398)은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면서 '고려 황제'라는 표현을 '참의지사(僭擬之事)'로 보고 종(宗)을 왕으로 개서(改書)했습니다. 참의지사는 '분수에 넘치게 흉내낸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노 교수는 "고려에는 황제 제도가 있을 수 없다는 편견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면서 "고려 궁중 음악 풍입송(風入松) 서두에 나오는 '해동천자당금제 불보천부화래(海東天子當今帝 佛補天助敷化來)'는 '제'와 '불' 사이를 끊어 읽어 '해동천자이신 황제는 부처가 돕고 하늘이 도와 널리 교화를 펴시다'고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 둘을 이어 붙여 '제불(帝佛)'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를 만들어내면서까지 고려 황제를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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