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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기사도 없던 앨런 튜링, 영국 50 파운드 지폐 새 얼굴


뉴욕타임스(NYT)는 올해 6월 6일 아주 재미있는 부고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는 '부고'에 제가 '재미있다'는 표현을 쓴 건 이 사람이 숨진 지 이미 65년이 흘렀기 때문. 이 신문에서 이제야 부고 기사를 내보낸 건 NYT에서 부고를 냈어야 하는 사람인데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NYT에서 65년 만에 부고 기사를 내보낸 인물은 (위에 있는 링크에서 보신 것처럼) 바로 앨런 튜링(1912~1954).


흔히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평가받는 튜링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선정한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100인'에 이름을 올릴 만큼 컴퓨터 과학 나아가 인공지능(AI) 분야에 지대한 연구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포스트 팬 위에 있는 사진은 그가 세계 최초 상용, 범용 일레트로닉 컴퓨터인 '페란티 마크 1'으로 동료들과 작업하는 장면입니다.


튜링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재학 중이던 1936년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그것의 결정 문제에 대한 적용(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을 통해 '보편적 기계'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튜링은 또 기계가 인간과 얼마나 비슷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튜링 테스트'를 만들어 1950년 논문 '계산 기기와 지성(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을 통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튜링상'은 '컴퓨터 과학계의 노벨상'으로 통합니다.

 

튜링은 전쟁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영국 정부 요청으로 나치 독일군 암호 해독을 맡아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그러니 2002년 영국 BBC 방송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인'을 선정하면서 튜링을 포함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앨런 튜링이 독일군 암호를 해독하는 과정을 소재로 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튜링 역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와이스타인 컴퍼니 제공


이렇게 대단한 인물인데도 NYT에서 튜링이 세상을 떠났을 때 부고를 내보내지 않았던 그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습니다. 튜링은 결국 화학적 거세형을 받았고 그 영향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결국 튜링은 1954년 6월 7일 자택에서 주사기로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한 입 깨물어먹고 자살했습니다. 지인들은 튜링이 1937년 월트 디즈니에서 만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즐겨봤다고 회상했습니다.


항간에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모양으로 생긴 애플 로고가 튜링 때문이라는 루머도 있었지만 이 회사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아, 그 생각까지는 못했다"면서 관련설을 부인했습니다.   


실제로 튜링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존 그레이엄커밍이었습니다. 그는 2009년 영국 정부가 튜링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청원을 제기해 고든 브라운 당시 영국 총리로부터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이어 2013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튜링을 사면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에서 동성애로 기소 당한 이들을 사면하는 법령 이름이 아예 '튜링 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튜링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등을 지게 됐습니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BOE)에서 50 파운드 지폐 뒷면 초상 인물로 튜링을 선정해 15일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파운드 지폐 앞면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초상이 들어가니까 서로 등을 진 모양새가 되는 것(이라고 우겨 봅니다). 


50 파운드 지폐 초상 인물을 발표 중인 마크 카니 잉글랜드은행(BOE) 총재. 맨체스터=AP 뉴시스


BOE는 지난해부터 50 파운드 지폐에 얼굴을 새길 인물 선정 작업을 진행했으며 대중으로부터 총 22만7299명을 후보로 추천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중 800명을 1차로 추렸고 다시 최종 후보 12명을 추렸습니다.


마크 카니 잉글랜드은행 총재는 이날 맨체스터 과학산업박물관에서 열린 새 지폐 도안 발표회에서 튜링을 새 모델로 고른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자기 어깨 위에 많은 이들을 태운 거인이었다"고 치켜세웠습니다.


현재 쓰고 있는 50 파운드 지폐는 2011년 첫 발행을 시작했으며 뒷면에는 산업혁명에 업적을 남긴 매슈 볼턴(1728~1809)과 제임스 와트(1736~1819)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BOE는 새 50 파운드 지폐를 2021년부터 시중에 푼다는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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