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화투 '하나후다(花札)' 중 11월을 뜻하는 비(雨) 20점 패.
정답은 오노 도후(小野道風·894~967)입니다. 사실 원래 오노가 살던 10세기에는 '道風'라는 이름을 '미치카제'라고 읽었지만 현대에는 '도후'라고 읽는 일이 더 많습니다.
오노는 후지와라 사리(藤原佐理·944~998), 1후지와라 고제이(藤原行成·972~108)와 함께 '산세키(三跡)'로 손꼽히는 일본 대표 명필입니다. 2
이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일본에서는 중국 왕희지(303~361) 스타일이 '모범 서체'로 통했습니다. 오노를 비롯한 산세키는 '조다이요(上代樣)'라고 부르는 일본 고유 서체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노는 11세기 일본 소설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현대적인 필체(今風で美しく目にまばゆく見える)"라는 평이 등장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습니다.
오노 도후가 928년에 쓴 병풍 초안 뵤부조다이(屛風土代). 일본 황실 소장
그렇다고 오노가 글씨 솜씨를 타고 났던 건 아닙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 역시 '과연 내게 서예 재능이 있을까'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침 창밖에는 비가 내렸고 오노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빗물로 불어난 개울 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 개구리는 개울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잡으려고 안감힘을 썼지만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졌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빗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판이었습니다.
개구리는 문자 그대로 필사적이었지만 오노는 속으로 '지 까짓 게 저 가지를 어떻게 잡겠다고…'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바람이 불어 가지가 흔들렸고 개구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지에 올라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장면을 본 오노는 (당연히) '나는 저 개구리만큼도 노력하지 않았구나'하고 반성했습니다. 그 길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서예에 매진해 일본을 대표하는 명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 도덕 교과서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이 에피소드는 일본 사람 대부분이 줄거리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합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명필 한석봉(1543~1605)이 어둠 속에서 떡을 써는 어머니와 맞대결을 벌여 패한 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이 이야기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1725~1770)가 그린 작품을 비롯 이를 모티프로 삼은 그림이 적지 않습니다.
스즈키 하루노부가 그린 오노 도후 일화. 도쿄(東京) 국립근대미술관 소장
이렇게 이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다가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트럼프가 하나후다(花札)로 변하는 과정에서 이 그림이 11월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하나후다는 (그리고 이 하나후다가 한반도로 건너와 이름이 바뀐 화투도) 총 48장인데 1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패가 각 넉 장씩입니다.
월별 패에는 기본적으로 각 달을 상징하는 꽃과 식물을 그려 넣었는데 11월은 버드나무(柳·야나기)가 주인공입니다. (사실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택입니다.) 일본에서 버드나무에 얽힌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이 개구리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이 그림이 11월을 대표하게 된 겁니다.
원래 하나후다에서 이 비광 주인공=오노는 스이칸(水干)을 입고 에보시(烏帽子)를 쓴 전형적인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년) 인물로 등장합니다. 반면 한국 화투에서는 옷과 모자 모두 중국식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왜색 논란을 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또 1월부터 10월까지는 하나후다와 화투가 똑같은데 11월과 12월은 서로 반대라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일본에서 오동(梧桐)나무가 12월을 맡고 있는 건 오동나무 동(桐)과 '사물이 일단 끝나는 곳'을 뜻하는 '切り' 모두 키리(きり)로 읽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화투에서 오동나무가 먼저 나오는 건 한국어는 발음이 비슷한 낱말이 없고 오동나무잎이 버드나무보다 먼저 지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 우산 든 남자 이름이 뭐라고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노 도후 또는 오노 미치카제입니다. 모른다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은 없겠지만 알아둔다고 나쁠 건 없겠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