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고사장을 확인 중인 수험생. 동아일보DB
역시 정권을 잡고 나면 대학 입학 시험 제도를 손 보고 싶다는 욕망을 끊을 수 없는가 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교육개혁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교육에서 공정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국민의 절실한 요구"라며 "11월 중에 획기적인 학생부종합전형(학종) 개선 방안과 서울 주요 대학의 수비 정시 비중의 지나친 불균형을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지시했습니다.
일단 다 옳은 말씀입니다. "교육에서 공정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풀이하면 "누구나 가정형편에 관계없이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터. 1920년대 이후 한 번도 현실이 된 적은 없지만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야 말로 모든 국민들 로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2002학년도 때 28.8%였던 수시 모집 비율은 2007학년도에 51.5%로 절반을 넘었고 올해(2020학년도)에는 77.3%까지 올랐습니다. 확실히 수시 쏠림이 심합니다. (2001학년도 이전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점수만 가지고 대학에 가는 '특차' 제도가 있었습니다.)
저 역시 기본적으로는 정시 선호자입니다. 2012년 이미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문 대통령이 "단순한 것이 가장 공정하다는 국민의 요구대로 누구나 쉽게 제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입시 전형을 단순화하는 과제도 추진해 주길 바란다"고 말한 것도 제가 저렇게 쓴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말 정시를 확대하면, 문 대통령 말씀처럼, "그래도 차라리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게 될까요?
'가정형편에 관계없이'라는 조건을 기준으로 공정성을 따진다면 정답은 '아니오'에 가깝습니다. 정시 그러니까 수능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간 신입생 가운데 부잣집 아들딸이 더 많거든요. 한국일보에서 2일 내보낸 기사를 인용하면: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2016~2018학년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경희대, 중앙대, 한국외대 6개 대학 입학생의 전형별 국가장학금 Ⅰ유형(소득연계) 수혜율을 비교한 결과 학종 입학생의 국가장학금 수혜율이 36.24%로 수능위주전형, 즉 정시 입학생의 수혜율(27.02%)보다 9%포인트가량 더 높았다. 국가장학금 Ⅰ유형이 가구소득 9, 10분위(소득환산액 월 923만원 초과)를 제외하고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시 입학생의 고소득층 비율이 대체로 더 높다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국 어떤 학교든지 전교 1등이 존재하니까요
아니, 꼭 전교 1등이 아니더라도 '그 동네'에서 인정받는 학생이라면 학종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학종 그리고 내신 성적을 바탕으로 하는 학생부교과전형은 '폐쇄적인' 지역 예선만 통과하면 그 뒤로도 '덜 개방적인' 전국 단위 경쟁이 기다립니다.
수능은 다릅니다. 수능은 전국 단위로 %가 나오는 완전 개방형 시험입니다. 이런 시험 성적에는 가정형편이 영향을 끼치는 영향력이 더 큽니다.
최필선(건국대), 민인식(경희대) 교수는 2015년 '사회과학연구'에 '부모의 교육과 소득수준이 세대 간 이동성과 기회불균등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실었습니다. 이들은 한국교육고용패널(KEEP) 데이터를 분석한 뒤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얻었습니다.
학생들 수능성적의 이질성(heterogeneity)을 부모의 소득 및 교육수준이 9.7% 정도 설명하고 있다. 즉, 학생들 수능성적 불균등의 약 1/10은 부모의 소득 및 교육수준 때문이고, 나머지 9/10는 학생의 노력과 운에 기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90% 이상을 학생 노력과 운이 좌우한다는 사실이 고무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대입 시험은 고만고만한 성적표를 가지고 경쟁을 벌입니다. 10% 차이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이건 어떤 시험이든 개방형 시험이 피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라는 말은 사실 '범인(凡人)'이 '굇수'와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쓰면 '그럼 너는 왜 정시에 찬성한다고 했느냐?'고 묻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저는 분명 '난도(難度)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전제 조건을 달았습니다. 어느 정도로? 그 옛날 본고사 수준으로요.
그래야 '사교육 효과'가 줄어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사교육 강사 중에 본고사 레벨을 수월하게 가르칠 수 있는 자원이 얼마나 될까요? 그걸 이해할 수 있는 학생 숫자는요?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단기간에 수능 난도를 지금보다 더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입니다. 제가 현재 정시 확대 정책에 반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시가 문제인 이유는 이게 끝이 아닙니다. 대학을 다니다가 중간에 제일 많이 그만두는 것도 정시로 입학한 이들입니다.
2017년 고교교육 기여대학 지원사업에 참여한 54개 대학 24만2790명을 상대로 분석한 결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으로 입학한 학생들의 중도탈락율은 4.5%로 가장 높았고 학생부종합전형(학종)으로 입학한 학생들의 중도탈락율은 1.5%로 가장 낮았다. 수능은 시험을 통해 확보한 점수로 대학에 진학하지만 학종은 교과·비교과 활동에서 전공적합성을 평가받고 대학을 간다.
그러면 어떤 제도가 상대적으로 공정할까요? 그건 항상 '현행 제도'입니다. 지금까지 대입 제도를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꾸고 또 바꿨지만 그 언제도 '공정의 가치'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 경험자 대부분 본인이 치른 대입 방식을 가장 공정하다고 믿는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도를 바꾸면 필연적으로 '정보 비대칭' 현상이 뒤따르게 마련이니까요.
그러면 불안한 (부자) 학부모는 '비법을 알고 있다'는 사교육 업체를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도가 바뀔 때마다 이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대응했는지 (혹은 그렇게 포장했는지)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면 이런 결정을 내리기 힘든 부모를 둔 수험생은 정보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정보 비대칭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냥 제도를 놔두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정보 비대칭 현상이 잦아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위정자는 늘 '우리 제도는 진짜 공정할 것'이라며 변화를 선택했고 그 결과 늘 새로운 정보 비대칭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대입 현실입니다.
문 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게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따님 케이스가 아주 관련이 없다면 거짓말일 터. 그런데 조 전 장관 따님이 '학종'으로 대학에 진학하신 게 벌써 9년 전입니다.
그 뒤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이 제도에 익숙해졌습니다. 조 전 장관 따님 케이스가 너무 강렬한 건 사실이지만 통계로 보면 가장 가난한 이들이, 가장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제도는 학종입니다.
사실은 제도가 아니라 이를 악용한 이들도 문제였던 겁니다. 이들이 제도를 악용할 수 있던 건 바로 정보 비대칭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그때도 틀렸으니 지금도 틀렸다'고 서둘러 제도를 바꾸는 게 옳은 일일까요?
사실 문 대통령이 처음 정시 확대 방침을 피력했을 때만 해도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대입 수시와 정시의 비율이 곧 바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고 확대해석"이라고 불을 껐습니다. 이제 실제로는 문 대통령이 정말 정시 확대를 원했다는 게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국 바꿀 겁니다. 단, 정권이 바뀌면 또 대입 제도를 바꾼다에 500원 겁니다. 그때가 되면 또 중3·고1은 '우리가 마루타냐'며 억울해 할 겁니다. 꼬리 때문에 몸통을 흔들 필요 없습니다. 놔두면 균형을 찾아가게 돼 있습니다. 위정자 여러분, 제발 대입 제도 좀 그냥 놔두세요. 쫌!
문 대통령은 대입 부정을 직접 경험해 보기도 했습니다. 1989년 부산 동의대 사건당시 입시 부정을 폭로한 김창호 교수 변호를 맡아 해임 무효 판결을 받아냈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더더욱 이 입시 제도를 손보고 싶은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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