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6월 23일 촬영한 스이구시쿠(슈리성) 전경. 아사히(朝日)신문 제공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나하(那覇)시에 있는 수이구시쿠(首里城)에 불이 났습니다.
'首里'를 일본어로 읽어 '슈리성'이라고도 부르는 이 성은 원래 류큐국(琉球國·1429~1879) 시절 왕궁(구시쿠·ぐしく)이었습니다. 1879년 류큐국을 강제병합한 일본 정부는 1933년 슈리성을 국보로 지정했고, 2000년에는 슈리성 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습니다.
나하시 소방국에 따르면 31일 오전 2시 40분경 슈리성에 불이 났다는 신고 전화가 들어왔습니다. 이후 소방차 52대, 소방대원 161명이 출동해 진화 작업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강하게 분 데다 건물에 스프링클러가 없었기 때문에 불을 끄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세이덴(正殿·정전)을 포함해 성 안에 있던 건물 여섯 채가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불을 모두 끈 건 오전 11시경.
불에 타 무너진 슈리성 세이덴. 아사히신문 제공
슈리성 공원에서는 해마다 축제를 열었는데 올해도 27일부터 축제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나하시 경찰은 "화재 발생 1시간 전까지 축제 행사에 쓸 조명 시설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 중입니다.
슈리성은 종교적으로도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특별한 곳입니다. 성 안에 곳곳에 '우타키(御嶽)'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류큐 신화에 따르면 우타키는 신(神)이 찾아오는 장소입니다. 슈리성 근처에 사는 미야 토요코(宮里 トヨ 子·84) 할머니는 아사히(朝日)신문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슈리성은 하느님(神樣·가미사마) 같은 존재였다.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잇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슈리성 세이덴 2014년 야경. 아사히신문 제공
이날 불에 탄 건물이 세계유산인 건 아닙니다. 원래 있던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해군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일본제국 육군 제32군 총사령부가 이 성에 자리잡고 있어 집중포화를 받았던 것.
전쟁이 끝난 뒤 성 터에 류큐대 캠퍼스가 들어서면서 슈리성은 아예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지만 1989년 복원을 시작해 1992년 세이덴 등 주요 건물을 새로 지은 뒤 '슈리성 국영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1992년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이 점령했던 오키나와를 일본에서 되돌려 받은 지 20년 되는 해였습니다.
2003년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 당시 슈리성 세이덴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 아사히신문 제공
그렇다면 오키나와 사람들이 잃어버린 건 사실 27년 된 '레플리카'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다마키 데니(玉城玉城デニー·60) 오키나와현지사가 "몸과 마음을 다해(全身全靈で) 반드시 복원하겠다"고 강조한 이유는 뭘까요?
조선 창경궁 사례에 대입해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일제는 1908년 조선 황실 전용 위안시설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창경궁에 있던 전각을 헐고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설치했습니다. 이듬해 11월 1일에는 일반인도 이 시설을 관람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한일합병 이듬해인 1911년에는 창경원으로 이름도 바꿨습니다.
1975년 봄 창경궁 홍화문 앞에 인파가 몰려든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해방 이후에도 창경원은 제 이름을 찾지 못한 채 계속 수도권에서 제일 유명한 '동·식물원 + 놀이동산' 노릇을 했습니다. 창경궁이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한 건 1983년 8월 17일 창경궁 복원 계획 및 서울대공원 건설 계획을 발표한 다음입니다. 이에 따라 창경궁에 있던 동·식물원을 경기 과천시에 자리잡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했으며 벚꽃나무는 여의도 윤중로 등에 옮겨 심었습니다.
한국은 결국 주권을 되찾았고 조선은 궁궐도 많았습니다. 오키나와는 여전히 일제강점기를 경험하고 있으며 정궁(正宮)은 슈리성 하나뿐입니다. 게다가 슈리성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영지(靈地·신령스러운 땅)이기도 합니다. 이런 곳을 겨우 원래 모습대로 복원했는데 하루 아침에 잃어 버렸다면 꼭 되찾고 싶지 않을까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심심한 위로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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