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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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耳をすませば)

남들에게 <귀를 기울이면(耳をすませば)>은 무엇을 떠오르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일까? 세이지(聖司)가 속으로 '시즈쿠(雫), 시즈쿠'하고 부르자 마법처럼 시즈쿠가 창면을 여는 위의 장면? 아니면 밖에서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더 좋은 원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니시(西司) 할아버지의 명대사?

내게도 이렇게 작품 내부의 무엇인가가 떠오르면 좋으련만, 나와 '귀를 기울이면'과 얽혀 있는 링크는 고교 일어 시간이다. 너무 시대를 앞서가셨던 것인지 우리 일어 선생님은 무려 이 영화의 스크립트를 수업 교재로 사용하셨다. 대학도 아닌 고교에서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고교의 일어반은 총 4반이었다. 문과 세 반, 이과 한 반. 그런데 일어 수업이 문과는 3단위, 이과는 1단위였으니 진도 조정에 애로사항이 있었던 건 당연한 일. 게다가 우리 때만 해도 일어는 수능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과목이었으니, 어쩌면 학생들을 좀 편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튼 그래서 우리 문과 일어반은 1주일에 한번은 이과와 마찬가지로 진도를 나가고, 나머지 2시간은 애니메이션 및 일본 드라마 감상에 할애됐다. 그러니까 1시간은 '귀를 기울이면' 스크립트로 수업을 진행하고 나머지 시간은 말 그대로 일어 시청각 자료를 틀어놓고 쉬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고3때 나는 꽤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었다. <원령공주(もののけ姬)>, <붉은 돼지(紅の豚)>,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 <추억은 방울방울(おもひでぽろぽろ)>등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대표작을 모두 이때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만 해도 일본 영화는 국내에서 사영되지 않았던 때였으니까 사실 이는 퍽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나 문제는 그때가 고3이라는 데 있었다. 지하에 위치한 시청각실, 소등된 상태로 모니터에는 말귀를 알아듣기 힘든 비디오클립이 재생되고 있다. '취침'이라는 선택을 하기에 너무도 좋은 조건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그때는 나중에 저 애니메이션을 다시 다운 받아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엎어져 자기에 바빴다. 그때는 확실히 자는 게 더 나은 선택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까닭으로 나중에 더 비싼 돈을 들여 일어 공부를 해야만 했다. 교재는 역시나 소설책과 만화책으로, 그때 권 선생님이 선택했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시나 모든 일을 미뤄두기만 하는 이 성격에는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도 이 장면만큼은 언제고 다시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 역시나 친숙한 John Denver의 노래 때문이겠지만.


야구가 취소된 흐린 저녁, 갑자기 이 애니메이션이 떠올라 버렸다. 그리고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의 낙서가 이렇게 남겨졌다. 원래는 '훌륭한 바이올린 장인이 될 테니까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어?' 이 대사에 대해 쓰고 싶었던 건데 말이다. 그러니까 결혼보다 청혼이 해보고 싶은 요즘 내 심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어긋났다는 이야기다.

어느 쪽이든 별로 재미는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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