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총명불여둔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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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수적이다.

나는 보수적이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든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하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보수의 의미부터 명확히 해 두어야 한다. 보수의 사전적 의미는 보전하여 지킴, 묵은 그대로 지킴 등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보수의 의미는 좀 다르다. 내게 있어 보수란 이상을 이해하는 현실주의다. 그건 현실을 바탕으로 이상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현실주의자는 그래서 내게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진보를 보수의 상대 개념이라고 할 때 진보의 의미는 현실을 이해하는 이상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진보와 보수는, 특히 보수는 사전상의 의미로밖에는 통용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누구도 나는 보수요, 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 없는 사회, 그건 진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독재와 빨갱이의 시비 속에서 진보도 보수도 모두 설자리를 잃고 수구와 급진만이 남아 저마다 보수와 진보를 자처하고 있다. 하지만 그네들의 어리석은 집착과 무모한 열정이 낳은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어지러운 현실 그 자체이다.

그렇다고 색깔 논쟁 따위를 벌이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색깔 논쟁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다. 색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실존의 잣대가 못된다.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보는 창이라는 의미는 결국 특정한 파장밖에는 걸러 내지 못하는 색안경이라는 소리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편견을 강요한다. 편견은 나쁜 것이다, 라는 편견의 편견, 그것 말이다.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그러다 다시 그 편견이다. 취향으로서의 편견 혹은 편견으로서의 취향. 거칠게 말해서 존재라는 것은 결국 취사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자유로운 취사선택이 가능한 곳에서만 자유로운 존재가 성립한다.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그곳에서 비로소 존재는 자신을 목소리를 가진다.

결국 언론 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다뤄진다. 어느 존재의 취향을 대변하느냐에 따라 언론의 성질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대학생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것은 거꾸로 대학생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선 대학생의 존재를, 즉 대학생의 취향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대학생의 취향, 그것은 대학생으로서 가져야 될 취향이 아니라 대학생이 가지고 있는 취향이다. 이상으로서의 취향이 아닌 현실로서의 취향, 그리고 취향에 대한 편견. 따라서 우리는 다시 취사선택의 문제로 돌아가 선택에 있어서의 자유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즉, 색안경을 벗느냐 쓰느냐 혹은 어떤 색깔을 쓰느냐의 문제에 대해 되짚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이 절대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취사 선택에 있어 유일한 강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색깔도, 심지어 투명한 색깔조차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앞서 밝혔듯이 중요한 건 창이 아니라 수용자의 취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다른 이에게 전달하려는 상황에서는 우선시되어야 할 취향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조화의 문제이다. 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 조화가 이루어져 있을 때에만 비로소 자유로운 취사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조화는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요구한다. 사람이 꼭 진보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꼭 보수적이면 안 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조화, 보수로서의 조화, 진보로서의 조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조화를 이룩할 수 있는 균형감각이다.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단 한번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찬가지 의미에서 세상은 변해야 하고, 단 한순간도 멈춤 없이 세상은 변했다. 하나의 대안은 늘 또 다른 새로운 대안을 통해 보수의 자리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혁명으로서의 균형감각, 균형감각으로서의 보수. 그래서 어쩌면 나는 당당하게 밝힌다. 다시 한번 나는 보수적이다.


─── kini 註 ────────

선택이 절대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취사 선택에 있어 유일한 강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색깔도, 심지어 투명한 색깔조차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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