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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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그리고 '춘천 가는 기차'

그저 고작 8곡이 들어가던 내 MP3 플레이어에서 '춘천 가는 기차'가 나왔을 뿐이었다. 넉 달 후면 군 훈련소에 들어갈 예정이었고 그 날은 2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었다. 차를 얻어타고 학교로 향하던 길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시험이 끝나면 춘천 가야지.'

과목은 잊었지만 시험을 마치고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작정 춘천역에 내렸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은 펑펑 눈을 토해냈다. 그제서야 며칠 다툰 여자친구 생각이 났다. 전화를 걸었든가 아니면 문자도 못 보내던 내 낡은 전화기만 만지작 거리고 말았든가.

지리도 모르면서 무작정 걸었다. 이제는 명동이라고 알고 있는 곳까지 눈을 흠뻑 맞고 걸었다. 그리고는 겨우 PC방에 들어가 자주 가던 동호회에 이런 글도 남겼다. (이런 글은 검색하면 왜 꼭 남아 있는 걸까?)

이래저래 시험이 끝나고 무슨 정신에 홀린건지 춘천에 와 있습니다.

상실의 시대 대신 스포츠 신문 두 부를 끼고 춘천 가는 기차 대신 커트니 러브의 목소리르 들으며 그렇게 춘천의 한 게임방 구석에 몸을 숙이고 있습니다.

눈 참 많이 오네요.

춘천역에서 102 보충대가 가까운 모양이더군요. 서너 달 뒤면, 길어야 너댓 달 뒤면 저도 그러고 있겠군요.

그래도 왔으니 닭갈비에 소주라도 한잔 걸치고 가렵니다.

글을 쓰고 무작정 식당에 들어가 닭갈비에 소주를 시켰다. 동행도 없이 옷에 양념 냄새가 잔뜩 배도록 술을 마셨다. 서울에서 먹던 그것과 한참 달랐던 닭갈비.

무작정 옆에 있던 어린 친구들에게 말도 붙였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고 대학 새내기가 될 생각에 들떠 있던 '아직 고3'들. 한껏 폼을 재며 대학 생활에 대한 허풍을 늘어 놓았다. 코 앞에 와 있는 찬란한 그들의 미래와 이미 사라진 내 초라한 과거에 대해서…

잔뜩 취해 동서울터미널행 막차를 타고 잠이 들었다. MP3 플레이어에서는 다시 '춘천 가는 기차'가 흘러 나왔다. "저녁에 돌아가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

맞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건 확실하다. 그 다음 어떻게 집에 왔는지, 아니 집에 오기는 한 건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전화는 분명히 걸었다. 둘이 나눈 이야기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뒤로 한 달도 안 돼 우리는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는 이제 조금도 중요하지 않지만 그때는 퍽 중요한 이유였는지 모른다.



헤어지고 며칠 뒤 서울에 폭설이 내렸다. 지하철을 무료 운행했던 바로 그 날. 신림역에서 술에 취해 일부러 시내버스를 여러 번 갈아 타고 집으로 왔다.

같이 술을 마신 형은 아직 내 이별 소식을 몰랐다. 형은 대신 새로 사귄 여자친구 자랑에 열심이었다. 내 여자친구와도 잘 아는 분이었다.

그날 그녀에게 끊어지는 전화를 걸었던가. 그래, 그 때는 아직 발신자 번호 표시가 없었다. 구 남친에게는 참 좋은 때였다. '아니 그냥 J누나 남자친구 생긴 걸 알고 있는지 전화했어.'

그 해 내 생일 나는 훈련소에 들어갔다. 하지만 1주일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는 확실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를 듣는데 어쩐지 닭갈비 냄새가 났다.


2007년 대통령 선거 특별 취재팀으로 춘천에 2주 동안 머물렀다. 일찍 일이 끝난 어느 날, 다시 그 닭갈비 집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대신 춘천 곳곳에는 배용준과 최지우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 날도 춘천엔 눈이 참 많이 왔다. 다시 '친구로' 연락하고 지내던 그 친구에게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상하게 눈이 많이 오면 춘천이 떠오른다.


아무 상관 없는 말이지만 이 친구는 같이 강촌에 갔던 걸 기억이나 할까? 어느 쪽이든 이제 답도 아무 의미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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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글은 '춘천 가는 기차' 그리고 '나를…'을 들으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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