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록(待闡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대천은 '때가 열리기를 기다린다'는 뜻. 이 책은 원래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 인물 박하원이 천유록(闡幽錄)이라는 이름으로 사도세자 사건과 이를 둘러싼 정치 사정을 기록해 정조에게 올린 책입니다.
정조는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이르다고 판단해 대천록이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실제로 이 책은 오랫동안 금서(禁書)였다가 1897년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자 박하원의 5세손 박승집이 비로소 간행 반포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 상권에 "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而烙刑等慘忍之狀不可勝言(세자가 내시, 무수리,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쇠끝을 달구어 피해자의 피부를 지지는 등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도사제를 동장하는 무리에서도 그가 연쇄살인마였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으며, 사도세자 아들인 정조 역시 이를 인정했다는 방증입니다. 사도세자 빈(嬪)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도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백 번 양보해 사도세자가 이렇게 된 이유가 정말 당쟁 때문에 생긴 정신병 탓이라고 해도 연산군보다 더한 이 살인 행각을 용서하기는 쉽지 않을 일입니다. 어떤 의도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빨아도 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좀 구분하면 안 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