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6월 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6·25 2주기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을 시작했다. 그때 대한의열단원 출신 유시태(1890~1965) 선생이 이 대통령 뒤 3m까지 다가가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이 대통령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 채 원고를 계속 읽었고, 호위 헌병 역시 열심히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사진은 올 4월 21일 미국 뉴욕에서 처음 공개)
(여기에는 자신의 정치적 관점에 따라 알맞은 접속사 또는 부사를 넣으시오.) 저격은 실패했다. 총알이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 선생은 현장에서 붙잡혔다. 조사 결과 유 선생은 동향(경북 안동시) 출신 김시현 민주국민당 의원(1883~1966)과 이 대통령을 암살하기로 뜻을 모았다. 김 의원 양복을 빌려입고 충무로 광장에 도착한 유 선생은 의원 신분증을 보여주고 귀빈석에 자리를 얻었다.
김 의원은 이후 재판에서 "6·25 전쟁 발발 다음날 독차(獨車)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 철교를 끊어 남하를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9·28 수복 후에는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 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그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라며 "암살 후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나 누가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많은 (젊은) 이들이 한국 전쟁 당시 이 대통령을 평가하는 것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각. 하지만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1896~1984) 평가는 조금 다르다. 그는 퇴역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Yalu)'를 쓰면서 "한국전쟁을 통해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제스나 네루 같은 대표적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다"며 "그는 한국전쟁을 보다 강력한 동맹국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나가려 투쟁함으로써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위엄과 긍지를 가져다주었다"고 평했다.
그러니까 역사란 어쩌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인지 모른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확신 말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63년 전 오늘자 동아일보에 이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 읽기: http://bit.ly/1GDl8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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