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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예찬


잡학(雜學)은 양심이 없다.


잡학은 이근안보다 더한 고문 기술자다. 아예 모를 땐 고통도 없다. 문제는 알 듯 말 듯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이때는 정말 고문이 따로 없다. 궁금증에 신음하며 잡학을 찾아 헤매다 답을 구한다 해도 그때뿐이다. 잡학의 고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인간이란 알면 알수록 더욱 알고 싶어지는 동물이 아닌가. 오호통재라! 호기심의 늪에 갇혔구나!


며칠 전 수박을 먹으며 프로야구를 보는데 갑자기 아내가 물었다. "씨 없는 수박이라고 샀는데 왜 씨가 있어? 이 노란 것도 씨 아냐?" '황규인의 잡학사전'이라는 꼭지를 쓰기 시작한 뒤로 나를 위키피디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읽어 본 적이 있던 내용이라 염색체 분리를 막는 콜히친과 종자 구실을 못하는 노란 씨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는 '이 정도면 넘어가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평소 귀찮다고 잘 해주지 않던 수박 주스를 만들어 내왔다. 응원 팀 연승을 보며 마시는 씨 없는 수박 주스는 참 달았다. 호기심의 늪에도 가끔 이렇게 연꽃이 핀다. 


야구와 씨 없는 수박을 생각하다 보니 씨 없는 수박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우장춘 박사(1989~1959)와 고시엔(甲子園) 그리고 박지성(37)이 연달아 떠올랐다. 고시엔은 해마다 열리는 일본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또는 그 대회가 열리는 구장을 일컫는 낱말. 박지성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축구 전설이다. 이 셋은 어떻게 연결될까.


고시엔이 열리는 여름 3주 동안 원래 일본 프로야구 팀 한신 타이거즈는 원래 안방인 이 구장을 대신해 인근에 위치한 교세라돔으로 안방 구장을 옮긴다. 교세라돔은 원래 오사카돔이라는 이름이었지만 교세라(京セラ) 그룹에서 명명권을 사면서 이름이 이렇게 바뀌었다. 교세라 그룹 설립자는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명예회장(86). 이나모리 회장의 장인이 바로 우 박사다. 이러면 고시엔부터 씨 없는 수박까지는 일단 선을 그을 수 있다.


씨 없는 수박과 박지성은 어떻게 연결될까. 우 박사가 묻힌 곳이 바로 경기 수원시에 있던 농촌진흥청이다. 박지성은 수원시청에서 그의 이름을 딴 길(현 동탄지성로)을 만들어줄 만큼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 그러니 씨 없는 수박과 박지성도 연결할 수 있다.


억지 아니냐고?  박지성이 일본 프로축구에서 뛸 때 몸담았던 교토 퍼플상가(현 교토 상가 FC)를 교세라에서 후원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 연결이 영 허튼소리는 아니라는 데 동의하실 거다. 참고로 이때 상가(サンガ)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말로 ‘동료’라는 뜻.


그러고 보니 잡학은 동료애이기도 하다.


‘잡학사전’을 쓰면서 항상 독자가 무엇을 궁금해 할까 궁금했다. 내가 선택한 건 솔직하게 독자에게 묻는 길이었다. 기사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직접 알아보기 귀찮다면 e메일로 제보해 달라'고 요청하는 문구를 넣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도 제보를 받았다.


그 결과 'FM 라디오 주파수는 왜 91.9㎒., 103.5㎒처럼 소수점이 전부 홀수로 끝나나요?', 'TV 화면 조정 시간에 뜨는 무지개는 도대체 뭔가요?', '운동회 때는 왜 청군 백군으로 나누나요?'처럼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지조차 몰랐던 질문을 받을 수 있었다. 


독자가 질문을 던져주시면 답만 취재하면 됐다. 기자는 직업 특성상 어떤 현상 또는 개념에 대해 일단 '넓고 얕게'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지지 않는 편이다. 이를 통해 독자는 호기심의 고문으로부터 벗어나서 좋고, 기자 역시 잡학 게이지(gauge)를 끌어 올렸으니, 양심 없는 잡학에 잽(jab) 정도는 날린 듯해 즐거웠다.


이 꼭지를 더 이상 쓰지 않는 지금까지도 더러 제보가 들어온다. 물론 지금도 메일이나 블로그 포스트 등을 통해 궁금즘 해결사를 자처하고 있다. 그러니 e메일(kini@donga.com)이나 페이스북(fb.com/bigkini)에 호기심의 고통을 내던지시고 조금 편안해 지셔도 좋다.


그래서 잡학은 위안이다.


유발 하라리 교수(42)는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책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에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고 썼다.


잡학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잡학은 기본적으로 '별 걸 다 안다'는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별 걸 다 궁금해 한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는 안심. 대신 우리가 함께 알아갈 수 있다는 위안. 그렇게 잡학의 전성시대에 호기심은 더욱 빛나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나이를 먹기 때문이 아니라 배움을 멈추기 때문에 늙는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계속 젊게 살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호기심의 늪에 빠져 보시라. 호기심에는 연령 제한이 없다.


모 회사에서 사보에 쓰겠다고 부탁받은 글입니다. 리드(글 첫 부분)를 어디선가 보신 것 같아도 잘못 보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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