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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행해서가 아니라 불행하다고 믿어서 헬조선에 산다


뒤늦게 '국민 73% "청년 불행하다"…노인·아이 불행 응답도 절반이상'이라는 기사를 보게 됐습니다.


22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저출산·고령사회 대응 국민 인식 및 욕구 모니터링'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년들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응답자 73.4%가 '불행하다'(매우 불행 25.2%, 조금 불행 48.2%)고 답했다.


여기서 '응답자'는 누구일까요? 전국 19세 이상 성인 2000명(남자 990명, 여자 1010명)입니다.


그러니까 청년에게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어본 게 아니라 성인에게 '청년이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겁니다.


같은 조사에서 노인(59.2%)과 아이(52%)도 '불행하다'는 답변이 절반을 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노인과 아이가 '나는 불행하다'고 답한 비율이 아니라 '나는 우리나라 노인과 아이가 불행하다'고 답한 비율입니다.


정말 한국은 이렇게 아이도 어른도 어르신도 모두 불행한 나라일까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사람은 원래 '남은 불행하다(또는 나보다 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은 더합니다.


여론조사업체 입소스(ipsos)는 해마다 사람들 인식과 실제 통계가 얼마나 다른지를 조사해 '인식의 위험성(Perils of Perception)'이라는 이름으로 결과를 발표합니다.


이 업체에서 전 세계 40개국 2만27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내놓은 (현재 확인 가능한 가장 최신 시점인) 2016년 자료를 보면 사람들은 평균 86.1%가 '나는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반면 '설문조사를 한다면 행복하다고 답하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요'라는 질문에는 44.3%가 그렇게 답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행복 관련 설문은 40개국 아니라 32개국에서 진행했습니다.)



한 나라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만약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데 남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위에 있는 그래프에서 대각선 왼쪽 위에 점이 나타나야 합니다. 보시는 것처럼 그런 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국인 가운데서는 90%가 '나는 행복하다'고 답해 조사 대상 32개국 가운데 공동 10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남도 행복하다'고 답한 사람은 24%에 그쳤습니다. 헝가리(22%)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숫자입니다.


그러면 한국인이 '나는 행복하다'고 답한 비율과 '남은 행복하다'고 답한 비율 사이 차이는 66%포인트가 됩니다. 물론 조사대상 32개국 가운데 제일 높은 숫자입니다.



이 결과가 재미있는 건 한국은 전체적으로 볼 때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세상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 



그런데 유독 다른 사람 행복에 대해서는 평가가 부정적인 겁니다. 왜일까요?


바비 더피 영국 킹스칼리지런던(KCL) 교수(정책연구소장)는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The Perils of Perception'이라는 책을 썼고, 어크로스에서 이 책을 '팩트의 감각'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해 한국 시장에도 내놓았습니다.


이 책에서 더피 교수는 우리(사람)가 생각하는 방식 그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외부적 요소 때문에 현실을 잘못인식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반복하는 실수"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흔히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정보보다 감정에 더 크게 반응한다고 꼬집습니다.


더피 교수는 계속해 "비판적 사고 능력을 키우려면 수학·과학·통계학을 중시해야 한다"면서 "세계 각국 국민 다수는 수리 능력 자체가 부족하고, 수리 능력을 갖춘 경우에도 정치적 신념이 수리 능력을 무력화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를 종합하면 실제 정보를 바탕으로 한국 사정을 살펴보면 '헬조선'이라고 하기가 어려운데도,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이라는 환상(myth)을 가지고 한국을 헬조선으로 만들기 바쁩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원래 나보다 남이 더 불행하다고 믿는 보편적 심리와 맞물려 재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행복하지만 그 믿음이 '한국은 헬조선'이라는 정치적 신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치적 신념과 거리가 있는 질문, 예컨대 '20세 이상 국민 100명 중 과체중이거나 비만인 사람은 몇 명일까요?' 같은 질문에는 아주 정확하게 (32명이라고) 답을 해도 이렇게 감정이 들어간 질문에는 엉뚱한 결론을 내놓는지 모릅니다. 물론 '이런 생각 역시 너의 정치적 신념일 뿐이다'고 하신다면 더 드릴 말씀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글을 쓸 때마다 강조하는 것처럼 저 역시 한국이 천국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그러니까 행복한 나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점이 꼭 우리가 사는 곳을 지옥으로 만드는 일일 필요는 없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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