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총명불여둔필
assignment Scribble/.OLD

09시 37분 대전발 수원행

너무 무뎌져버린 내 세반고리관 속의 방향 지시계가 이제서야 북쪽을 가리킨다.
낡은 구둣발에 자근자근 밟히며 걸어 온 바지 끝자락에 뭍은 흙을 처음으로 털어낸다.
또 엉뚱한 사랑에 빠지려 하는 거냐고 너는 묻는다, W에겐 J를, J에겐 H를, H에겐 W를
이야기하며 하루를 보내야만 할 거냐고 너는 물어온다. 낯선 외국인에 의해
점령당한 간이 식당칸 한 구석에서 먹는 김밥처럼 적당히 나의 목을 메여온다.
연결 칸 계단에 앉아 차가운 신문지를 접어 올리면서 얼핏 든 졸음의 원망보다,
사랑하면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거라는 너의 말대로 떠오르지 않는 너의 얼굴 때문에,
당분간 다시 꿈꿔도 좋다는 너의 승인장처럼 난 결코 값싸지 않은 너의 친절을 다시
한번 기다린다. 이번엔 떠나지 말아야 한다. 환상이란 것도 어차피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일 뿐, 환상에 포위되거나 점령되는 일에는 너의 승인장도 현실의
명령에 거역할 자격을 부여하지 못한다. 나를 찾지 않는 너의 자유에도 구속될 수
있는 난, 내 자신을 위해 처음으로 끓인 쓴 커피를 마시듯 이제서야 비로소 어른이
되고자 애쓰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모든 것을 시기할 수는 없을 만큼 둔해져 버린
이기심 앞에서 남의 이기심을 탓하는 나의 이기심을 원망한다. 어릴 적부터
가슴에 담고 살아 온 하나의 바램, 얌체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
하루, 난 너의 배려에 진정 감사해한다.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려 한다는 것, 정말이지 언제나 무덤덤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 kini註 ────────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나지만 1999년
제갈 희.

댓글,

Scribble/.OLD | 카테고리 다른 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