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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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각의 습격

흔히 헤어진 연인을 떠올릴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감각은 후각이다. 비누나 샴푸, 향수 따위의 냄새는 곧잘 우리를 청승맞게 만든다.

물론 나 역시 후각의 유혹에 시달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후각보다는 촉각에 더 예민한 타입이라는 생각이 곧잘 들고는 한다. Creator on the hill에 살던 시절 나는 더러 너무도 생생한 기억에 가슴이 아려 끊었던 담배를 피우곤 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나는 여전히 나와 만났던 아이들의 손가락 두께나 쥐는 힘, 체온 등을 기억한다. 땀은 어느 정도였는지도. 이런 것들이 비누 향기와 함께 고스란히 떠오르곤 한다.

예컨대 m과 손을 잡으면 손가락 사이에 약 0.08mm 정도의 작은 균열이 생겼다. 체구에 비해 손을 꼭 잡는 편이었고, 전체적으로 차갑고 메마른 손이었다. 달리 말해 내가 잡기에 최적이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작은 균열 사이로 부유하는 공기층의 느낌은 여전히 내 심장을 떨리게 만든다.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는지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각도와 무게감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귓바퀴를 만지면 어떤 느낌이었는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물론 그때 풍겨 나오던 샴푸 냄새도 함께 말이다.

입을 맞추기 위해 두 뺨을 쥐었을 때의 기억 역시 생생하다. 미묘하게 3차원으로 틀어지는 얼굴 각도와 볼, 코 끝의 체온 같은 것들.

이런 식으로 확장해가면 물론 좀더 은밀한 감각까지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더러 무방비 상태로 찾아오는 촉각의 습격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Virtual Reality라는 건 이미 오래 전에 나의 뉴런 속에서 완성됐던 것이다.

구로에서 시청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한 여고생이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아, 이 느낌 참말 오랜만이구나" 싶은 기분.

참고로 구로에서 시청역까지 지하철을 함께 탄 여자친구는 딱 한 명이었다. 글쎄, 그 녀석 그랬던 적이 있다는 것 기억하고 있을까?


─── kini註 ────────

jui가 청승맞은 게 나랑 어울린대서 그냥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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