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 전 간단한 퀴즈부터 풀겠습니다. 아래 두 그림에는 서로 다른 색깔이 하나 씩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그림에서 색깔이 다른 걸 찾아낼 수 있으신가요?
저는 오른쪽입니다. 하나는 분명히 다르니까요. 왼쪽에는 다른 색이 들어 있을까요? 글을 읽으면서 정답을 알아봅시다.
호메로스는 색맹?
빅토리아 왕조 시대 영국 총리를 네 번 지낸 윌리엄 글래드스톤(1809~1898·사진). 그는 평생 책을 2만 권 넓게 읽은 걸로 유명합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광팬이었습니다.
글래드스톤은 반복해서 호메로스를 읽다가 재미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연히 푸르러야 할 에게 해(海)를 호메로스는 '진한 와인 빛'이라고 표현했던 거죠. 물론 이는 문학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녹색 꿀, 겁에 질린 녹색 얼굴 같은 표현이 계속 등장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그래서 호메로스 작품에 등장한 색깔을 세기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검은색 170번, 흰색 110번, 빨간색 13번을 제외하면 다른 색깔은 10번도 등장하지 않는 겁니다. 심지어 파란색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고민에 빠진 글래드스톤은 호메로스가 색맹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문호만 색맹이어서는 안 되겠죠. 때문에 그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두 색맹이었다고 가설을 세우게 됩니다.
언어학의 반격
하지만 당연히 그럴 리가 있나요? 20세기 들어 (제 학부 전공인) 언어학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냅니다. 사람은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 언어 체계가 재해석한 세상을 본다는 거죠.
이게 색깔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언어학자들은 고대 문서를 가지고 어떤 색깔이 언제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는지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언어에서 똑같은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흑백을 구분하고 그 다음 빨간색이 나옵니다. 이어서 녹색과 노란색. 맨 마지막이 파란색이었던 겁니다. 게다가 녹색과 파란색을 구분하지 않는 언어가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우리말도 그렇습니다. 푸른 하늘은 파란색에 가깝겠지만, 푸른 숲은 녹색에 가까울 테니까요.
힘바 족(族) 사례
그렇다면 여전히 파란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않는 언어가 있다면 어떨까요? 이를 알아보려고 언어학자들은 아프리카 나미비아 북부에 사는 힘바 족을 찾아갔습니다. 그 다음 위에 등장한 그림 두 개를 주고 똑같은 질문은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힘바 족 사람들은 왼쪽에서는 손쉽게 다른 색깔을 찾아냈지만 오른쪽에서는 못 찾았습니다. 이 동영상에서처럼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시 그림을 보시죠. 어떻게 오른쪽에서는 못 찾으면서 왼쪽에서만 다른 색을 찾아낼 수 있는 걸까요?
정답은 이들 언어 때문입니다. 보통 현대어는 기본 색깔을 11가지로 구분합니다. 힘바 족이 쓰는 말은 이게 5개뿐입니다. 이들은 색깔을 아래 그림처럼 구분합니다.
그러니까 힘바 족 사람들에게 왼쪽 그림에는 부로우(burou)에 둠부(sumbu)가 섞여 있는 거지만, 오른쪽 그림은 전부 부로우뿐이었던 겁니다. 사실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으로 찍어 보면 왼쪽 그림에도 분명히 다른 색깔이 숨어 있습니다.
확실히 우리는 세상을 두 눈으로 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뇌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겁니다. 아니라면 이런 색깔 구분도 아래 동영상 같은 현상도 보지 못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