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을 시작하기 전 동아일보 산업부 김상훈 기자가 최근 펴낸 책 '
빅 스몰(Big Small)'에서 한 부분부터 같이 읽겠습니다.
"데이지, 데이지. 뭘 어찌 해야 할지 대답을 들려줘. 나는 반쯤 미쳐버렸어. 당신을 사랑하니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68년 만든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공지능 컴퓨터 할(HAL)은 주인공 데이브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너무나 똑똑해서 우주선 '디스커버리 원'의 조종을 도맡았던 인공지능 컴퓨터 할은 그 놀라운 지능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 '임무의 방해 요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할을 만든 인간들은 할에 의해 죽음에 이를 상황이 됐다. 승무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데이브는 할을 수동으로 작동 중지시키기 위해 할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힘으로 통제실에 접근한다. 그러고는 할의 모듈(부품)을 하나씩 뽑으며 시스템을 중단시켜 나갔다. 할은 그 과정에서 "그만둬요, 데이브"라며 자신이 처음 만들어졌던 초기 상태까지 퇴행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가 '어린 시절 부르던 노래'였던 <데이지 벨>이란 노래를 부르며 작동을 멈춘다.
도대체 이 글하고 컴퓨터 키보드 왼쪽 맨 위에 달려 있는 'Esc' 키하고 무슨 상관인 걸까요? 한번 인간과 컴퓨터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하버드대 잭 데너린 교수(공중보건학)에게 물어볼까요?
그는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Esc 키는 '이 바보 같은 컴퓨터야, 네가 하는 일 그만두고 이제 내 말을 좀 들어'하고 말하는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NYT는 이 말을 전하면서 "Esc는 컴퓨터에게 주인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 준다"고 풀이했습니다.
그러니까 할에게 Esc 키가 달려 있었다면 데이브는 저렇게 생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큐브릭 감독은 영화에서는 거장이지만 영화가 나오기 8년 전에 이미 세상에 등장했던 Esc 키의 존재는 몰랐던 겁니다. (아니면 그 기능을 과소평가했거나요.)
Esc 키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건 1960년. IBM의 프로그래머였던
밥 베머(1920~2004·사진)는 '바벨 탑' 문제를 해결하는데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컴퓨터 제작사마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 서로 다른 코드를 썼습니다. 자연스레 프로그래머들도 작업 과정에서 코드를 번역할 일이 잦았죠. 베머는 Esc 키를 개발, 코드 전환 과정을 쉽게 만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프로그래밍 코드는 표준화됐고 Esc 키는 '중단'을 뜻하는 아이콘이 됐습니다.
사실 Esc 키 기능을 생각하면 '도망가다(Escape)'는 뜻은 사실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차라리 'Int(interrupt)'가 어울리죠. 그런데 왜 Esc일까요? 그건 베머가 타고난 걱정근심의 사나이였기 때문입니다. 베머는 1960년대 이미
Y2K 버그(2000년이 되면 컴퓨터가 연도 계산을 잘못해 산업이나 경제, 전기 등 중단이 치명적인 곳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던 거죠.
Esc 키가 재미있는 또 한 가지는 PC와 맥에서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는 겁니다. 거의 똑같은 기능을 하는 키가 PC에서 Alt는 맥에서 Option, Ctrl은 Cmd인데 Esc는 Esc인 거죠. 어쩌면 컴퓨터가 제 고집을 꺽으려 들지 않을 때 '제발 이 혼란에서 도망갈 수 있게 해줘'하고 생각하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팁 하나: 이제는 '작업 관리자'만 띄우면 온 몸을 써서 통제실에 가지 않고도 컴퓨터가 벌이고 있는 뚱딴지같은 일들을 손쉽게 중단할 수 있습니다. Esc 키를 Ctrl, Shift 키하고 같이 누르면 작업 관리자가 바로 뜹니다. 맥에서는 Option+Cmd+E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