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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을 읽읍시다 #52 조선 최고 농구 스타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 스타로 공인받은 인물은? 아마 야구에 조금만이라도 관심 있는 팬이라면 '이영민 타격상'의 이영민 선생을 금세 떠올릴 터. 그럼 농구 스타는? 맞다. 프로농구(KBL) 페어플레이상 '이성구 기념상'의 이성구 선생이다. 이 상뿐 아니라 연세대가 동문 스포츠 지도자에게 주는 상 이름도 선생 이름을 땄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김훈 서장훈 등이 함께 뛰었던 1990년대 중반 연세대 농구부가 최고였다고 말할 터. 그러나 연세대 전신 연희전문 출신 올스타가 한 데 뭉친 1936년 전연전(全延專) 멤버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제16회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겸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 대회에서 도쿄(東京)제대를 46-38로 꺾고 결승전에 진출해 교토(京都)제대를 42-22로 꺾고 우승했다. (연세대 동문들 '좋아요' 누르시라고 밝히자면 고려대 전신 보성전문 올스타, 즉 전보전·全普專은 1회전에서 탈락했다.)

그 중심에 이성구 선생이 있었다. 당시 선생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진명여고에서 교직에 발을 들인 상태였고, 나중에도 연세대 체육부장을 지내면서 방렬 신동파 김인건 같은 당대 최고 스타들을 길러냈다. 선생이 운동하던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건 늘 똑같은 한 마디 "졸더라도 수업 들어가서 졸아라." 선생은 우리 농구 대표팀이 20년 만에 중국을 꺾던 2002년 아시안게임 결승전날 숨을 거뒀다. 그의 묘비에는 "비열한 승리보다 당당한 패배를"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기사 읽기:  http://bit.ly/Skp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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