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첫 번째 흉부외과 수술로 인정받는 기록은 1910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칼에 찔린 한 남자를 살린 내용이다. 이 자료를 보고 "의학 기술 발달이 5년 정도 늦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가 끝내 이 수술 후유증으로 숨지자 동아일보는 1926년 2월 13일자에 이렇게 썼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이제 천벌을 영원히 받아야지." 그때 살아난 사람은 이완용이었다.
우리에게 이완용=친일파이지만 그는 일본말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그는 초기 미국 주재 외교관답게 나라를 팔아먹을 때도 영어를 썼다. 죽을 때 아들에게 남긴 유언도 '이제는 미국이 초강대국이 될 것 같으니 친미파가 되라'는 거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완용이 염라국 사람이 되었으니 (염라국마저 팔아먹을까봐)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이 돼 마음이 편치 못하다"던 '횡설수설'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http://bit.ly/11FxuY5
이완용이 오래 독립협회를 이끌었고 독립문 현판도 썼으니 그에게도 인정받을 만한 점이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독립협회부터가 사실 알고 보면… 그래도 개화사상 신봉자로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의무교육 제도를 도입한 점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 의무교육 덕에 온 국민이 매국노의 대명사로 그의 이름을 알고, 이렇게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완용 개새끼!" (혹시 전국에 계실지 모를 이완용 씨께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설마 한 분도 없지는 않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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