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5일부터 시간을 30분 늦추기로 했다는 소식 들으셨을 겁니다. 이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에서 인용하면:
북한 노동신문은 7일 1면에서 "조국해방(광복) 70돌 일제패망 70년을 맞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하는 시간을 표준시간으로 정한다"고 보도했다. 15일부터는 한국이 오후 4시면 북한은 오후 3시 반이 되는 것. 표준시에서도 남북이 분단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셈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표준시를 "각 나라나 각 지방에서 쓰는 표준 시각. 평균 태양이 자오선을 통과하는 때를 기준으로 정하는데, 우리나라는 동경 135도를 기준 자오선으로 한 평균 태양시를 쓴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경 135도는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효고(兵庫)현 아카시(明石)시를 지납니다. 북한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표준시간까지 빼앗았다"고 주장한 이유죠.
이에 대해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일제잔재 등의 측면이 아니고 국제적인 관례와 실용적인 측면이 더 기준이 돼 135도를 기준으로 표준시를 썼던 것"이라며 "국제적으로 표준시는 인접한 국가의 자오선을 쓰게 돼 있다. 우리는 중국 쪽(120도)과 동경 쪽(135도)의 중간에 있다 보니 일반적인 국제적 관례에 따라 동쪽을 쓰고 있으며, 그것이 통상 실용적인 측면이 있다. 일광 절약이라든지 또는 낮 시간을 활용하는 측면에서는 대개는 오른쪽을 쓰는게 맞다"고 설명했습니다.
정 대변인 설명에서 2% 아쉬운 건 거의 표준시를 정할 때 정수(整數) 단위로 시차를 두는 게 표준이라는 점을 빼먹었다는 겁니다. 학창 시절에 지리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은 그리치니 평균시(GMT·Greenwich Mean Time)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터. 1884년 그리치니 천문대가 있는 영국 런던을 기점으로 삼아 정리한 시간 체계입니다. 1972년 1월 1일부터는 국제원자시와 윤초(閏秒) 보정을 기반으로 하는 협정 세계시(UTC·Coordinated Universal Time)가 국제 표준입니다. GMT와 UTC는 소수점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보통 세계 시간은 UTC를 기준으로 ±를 통해 나타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표준시는 UTC+9입니다. '표준시를 정할 때 정수 단위로 한다'는 건 +9처럼 뒤에 붙는 숫자를 정수로 한다는 뜻입니다. 북한처럼 바꾸면 UTC+8½가 됩니다. 정수로 돼 있어도 시간 계산이 복잡할 때가 있는데 이렇게 바꾸면 정신 없는 게 당연한 일일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숫자를 아예 쓰지 않는 건 아닙니다. 이란은 UTC+3½을 쓰고, 아프가니스탄은 UTC+4½입니다. 인도와 스리랑카는 UTC+5½, 미안먀는 UTC+6½입니다. 베네수엘라도 UTC-4½입니다. 이 중 스리랑카(2006년)과 베네수엘라(2007년) 역시 21세기 들어 소수 단위로 바꾼 사례입니다. 그러니 북한만 전 세계에서 유독 이상하게 느닷없이 표준시를 바꾼 건 아닙니다. (꼭 이런 나라들만 이렇게 바꾸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이겠죠?)
게다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표준시간까지 빼앗았다"는 주장 역시 옳은 말입니다. 대한제국은 1908년 4월 1일 관보 제3994호에 따라 동경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표준시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1912년 조선총독부 관보 제367호에 따라 동경 135도가 기준이 됐습니다. 그 뒤 일제강점기가 지나고도 1954년까지 이 기준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4년 대통령령 제876호를 통해 다시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되돌렸습니다. 표준 자오선을 바꾸는 게 정말 일제 청산이라면 남한이 먼저 시행했던 것. 신동아 2005년 5월호 기사 한 토막을 보면:
'조선일보' 사설에서도 "일월의 출입시간이 정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본 표준시를 그대로 쓴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유쾌한 일이 아니었는데 이번에 종래의 우리 표준자오선으로 복귀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시간의 광복'이라 할 것으로 당연한 일이다"며 변경의 의미를 확실히 밝혔다. 이처럼 우리나라 서울 땅을 기준으로 표준시를 설정한 조치에 대해 당시의 분위기는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서울 종로 보신각과 전국의 학교, 교회, 사찰은 종과 사이렌을 일제히 울림으로써 국민 모두 '시간의 광복'을 경축했다.
이 전 대통령은 여름에는 UTC+9½로 시계를 맞춰야 하는 서머타임 제도도 같이 도입했습니다. 이 시간이 우리 생활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1961년 다시 시간을 바꿉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11일부터 시간이 30분 빨라졌다. 지금까지 섬머타임으로 시계바늘을 돌리느라 여러 차례 어리둥절했던 때문에 대부분이 무관심한 태도"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해방 후 4287년 3월 21일 127도30분선으로 복귀했다가 이번에 재개정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네, 당시는 무려 단기(檀紀)를 썼던 겁니다.
다시 동경 135도가 기준이 된 지 54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표준시를 바꾸자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관련법을 내놓은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맨 처음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를 다시 보면:
국회에서는 탈북민 중 첫 국회의원인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2013년), 박대해 한나라당 의원(2008년), 조순형 새천년민주당 의원(2000년) 등이 표준시 관련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묻혔다.
요컨대 우리도 바꾸려면 못 바꿀 게 없습니다. 신동아 기사 제목처럼 "한국 표준시 30분 늦추면 '대충대충' 풍토 사라진다"는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54년 전 시계바늘을 되돌리고 나서 여태 아무 불편한 게 없었는데, 시계를 새로 돌려 생기는 불편함을 일부러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문제점과 대안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북한이 먼저 UTC+8½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바꾸자는 이들이 훨씬 줄어들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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