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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사 첫 번째 해외 특파원은 누구? 혹은 옛날 신문을 읽읍시다 번외편


한국 언론 역사상 첫 번째 특파원(特派員)은 '한국 만화의 아버지' 김동성 선생(1890~1969)이다.


동아일보에서 김 선생을 중국 중국 베이징(北京)에 특파한 건 창간(1920년 4월 1일) 한 달 전이었다. 동아일보 이전에도 당시 조선에 신문사는 있었지만 특파원을 둔 곳은 없었다. 아직 창간도 하지 않은 언론사에서 중국에 기자부터 특별 파견한 건 ‘축하 휘호(揮毫) 득템' 때문이었다.


김 선생은 중국 국부(國父) 쑨원(孫文·1866~1925)에게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글씨를 받아 동아일보 창간호 2면에 내보낸 것을 비롯해 중국 저명 인사 20명에게 축하 휘호를 받아 돌아왔다. 물론 휘호만 받은 건 아니고 이들을 인터뷰한 ‘연경만필(燕京漫筆)’ 시리즈도 창간 후 지면에 썼다. 당시 이 시리즈 바이라인(byline)은 '재북경(在北京) 특파원'이었다.


동아일보 창간호 2면(오른쪽)과 3면. 오른쪽 위에 있는 휘호가 바로 김 선생이 쑨원에게 창간 축하 선물로 받아온 것. 왼쪽 위에 있는 갓난아이 그림을 그린 이도 김 선생이다.


김 선생은 그해 8월 추송 장덕준 선생(1891~1920)과 다시 베이징을 찾는다. 미국 상하원 의원단이 베이징에 방문하자 당시 조선 사정을 소상히 전달하라며 두 사람을 특별 파견했던 것. 두 사람은 결국 이 일행이 서울에서 하룻밤을 보내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김 선생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출신으로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했지만 장 선생은 영어는 물론 중국어도 할 줄 몰랐다. 그가 한국 언론 역사상 두 번째 특파원이 된 건 당시 그가 회사에서 맡고 있던 직책이 '조사부장'이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장 선생은 두 달 뒤 나중에 경신참변이라고 부르게 된 간도 한인 무차별 학살 사건을 취재하겠다며 특별 파견을 자청했다가 결국 목숨을 잃는다. 한국 기자 첫 번째 순직자도 특파원이었던 것이다.


더 안타까운 건 당시 동아일보가 일본 황실 상징인 삼종신기(三種神器)를 우상숭배로 비하했다는 이유로 무기정간 중이었다는 점이다. 언제 기사를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는데도 그는 '속간이 되면 반드시 보도해 국내외에 널리 알리겠다'며 스스로 위험을 무릅썼다. 지금도 이 기자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동아일보 편집국 한 가운데 장 선생 사진이 역시 취재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후배 기자 두 명 사진과 함께 걸려 있다.


그렇다고 당시에 ‘해외 주재원’으로서 특파원 개념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나중에 소설 ‘삼대’ 등을 쓰는 횡보 염상섭 선생(1897~1963)은 1920년 당시 일본 도쿄(東京)에 거주 중이었는데 동아일보는 창간과 함께 그를 도쿄 주재 기자로 채용했다. 지금이라면 이런 기자를 도쿄 특파원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애매한 게 사실. (지금도 동아일보 도쿄 사무실은 '동경지사'다.) 염 선생은 창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해 국내에서 일하게 된다.


이후에도 창간 1주년 기념으로 백두산에 특파원을 보내는 등 '취재 아이템이 있는 지역에 특별히 파견한 기자'를 특파원이라고 부르던 동아일보는 1922년 해외에 거주하던 지식인에게 ‘통신원’ 자리를 촉탁(囑託)하며 상설 특파원 시대를 연다. 이들 가운데는 중국 상하이(上海) 주재 통신원을 맡았던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도 있었다. 여 선생이 동아일보 통신원을 맡은 건 동아일보 초대 주필 설산 장덕수 선생(1894~1947)과 신한청년당 시절부터 우정을 쌓은 '절친'이었기 때문. 참고로 장덕수 선생 친형이 바로 장덕준 선생이다.


여운형(呂運亨) 선생이 동아일보 상하이 통신원 자격으로 보낸 첫 번째 기사 호상잡신(滬上雜信). 설산(雪山) 장덕수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그 이듬해(1923년)부터는 본사 기자를 해외 상주 특파원으로 보내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동아일보) 해외 특파원 제도를 시작했다. 동아일보에서 특파원을 보낸 첫 파견지는 미국 워싱턴, 도쿄 그리고 상하이였다.


물론 지역에 따라 여전히 통신원도 존재했고(통신원 제도는 지금도 존재한다), 이슈가 있을 때 본사 기자를 특별 파견하는 특파원도 존재했다. (이 제도 역시 지금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중국 국민당 정부가 1928년 5권헌법을 선포하고 국민 정부를 수립하자 동아일보는 송아 주요한 선생(1900~1979)을 난징(南京)에 특별 파견했다. 원래 당시 주 선생은 경쟁지 특파원보다 하루 늦게 난징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산문시로 1보를 쓰는 재치로 속보 경쟁에서 앞서기도 했다.


동아일보에서 상하이에 이렇게 계속 취재 인력을 뒀던 건 물론 임시정부 때문이었다. 신일철 전 고려대 교수(1931~2006)에 따르면 임시정부에 특파원을 둔 언론사는 동아일보밖에 없었다. 신 교수는 1925~1936년 동아일보 상하이, 난징 특파원을 지낸 은암 신언준 선생(1904~1938) 아들이다.


거사 직전 이봉창(1900~1932·왼쪽), 윤봉길(1908~1932) 의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봤을 듯한 이 두 사진을 상해 주재 외국 언론사에 돌린 사람이 바로 신언준 선생이다. 


신 선생은 사실상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하는 건 물론 상하이에 은신 중이던 루쉰(魯迅)과 비밀리에 만나 '신동아'에 인터뷰 기사를 보내기도 했다.


눈치가 빠른 분이라면 여 선생과 신 선생 사이에 또 다른 특파원이 있었다는 점을 눈치채셨을 터. 여 선생 다음으로 동아일보 상하이 특파원을 맡았던 건 유광렬 선생(1898~1981)이었다. 그는 1924년 11월 6일자에 아주 재미있는 기사 '죽어도 고국강산'을 쓴다. 이 기사를 요즘 말 비슷하게 바꾸면 이렇다.


상해임시정부 김구 주석 모친 곽낙원 여사(67)는 오늘날까지 아들과 함께 파란중첩(波瀾重疊·온갖 변화가 난관이 많음)한 생활을 해오며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에 고향 황해도 신천군을 떠나 며느리와 손자들을 데리고 아들 김 주석이 있는 상하이로 건너와서 인정풍물(人情風物)이 모두 생소한 이역만리에서 매일같이 분투(奮鬪)의 생활을 해오던 중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에는 같이 고생살이를 해오던 그의 며느리, 즉 김 주석의 아내가 불행히 병마에 걸려 타향에서 황천의 길을 먼저 떠나가게 되면서 곽 여사는 타지에서 현숙(賢淑·마음이 어질고 깨끗함)한 며느리를 잃어 버리고 눈물 마를 날이 없이 오직 죽은 며느리 소생인 여섯 살 된 손자와 두살 된 손자를 데리고 눈물로 세월을 지내다가…


요즘에는 고국 생각이 간절하다고 그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준비 중이라는데 상하이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고국에는 가까운 친척도 한 사람 없는데 늙으신 이가 그대로 나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만류하나 도무지 듣지 않고, 백골이나 고국강산에 묻히겠다고 하며 상하이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는데 아들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하니 어쩔 수가 없다 하며, 곽 여사가 조선에 나간대도 갈 곳이 없으므로 그의 앞길이 매우 암담하다고 사람들은 매우 근심하는 중이라.


그래서 곽 여사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백범일지'에서 찾을 수 있다.


어머님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실 때 여비를 넉넉히 드리지 못해, 겨우 인천에 상륙하시자 여비가 떨어졌다. 떠나실 때 내가 그런 말씀을 드린 바 없건만, 어머님은 인천 동아일보 지국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신문에 난 상하이 소식을 보고 벌써 알았다면서 경성 갈 여비와 차표를 사서 드렸고, 경성에서 다시 동아일보사를 찾아가니 역시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고 했다.


물론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고국에 묻히겠다'던 곽 여사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 배후로 아들이 지목 당하자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식모'를 자처했다. 이후 임시정부가 여러 번 자리를 옮기던 중 병을 얻어 1939년 끝내 아들이 소원을 이루는 걸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아들의 소원은 물론 '대한 독립'이었다.


동아일보 역시 조선총독부 폐간 조치에 따라 1940년 8월 10일 문을 닫으면서 대한 독립 사실을 보도할 수 없었다. 동아일보가 다시 세상에 돌아온 건 1945년 12월 1일 중간호(重刊號)를 내면서. 창간호 때 그렇게 중요했던 휘호가 중간호 때라고 빠질 수는 없는 법. 중간호 때 축하 휘호를 남긴 건 (물론)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었다.



이때 백범 선생이 남긴 휘호는 경세목탁(警世木鐸). '세상을 깨우치는 목탁이 되어라'는 뜻이다. 쓰고픈 말 많지만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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