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총명불여둔필
assignment Currents

범고래도 (외)할머니가 손주 돌본다

클립아트코리아


신혼부부 55.6%는 친정과 10㎞ 이내에 신접살림을 꾸립니다.


이유는 당연히 '육아'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육아는 아빠보다 엄마 몫이 더 큰 게 현실이고, 엄마는 시어머니보다 친정 엄마가 편할 테니까, 친정 근처를 선호하는 것.


실제로 육아정책연구소에서 내놓은 '전국보육실태조사 - 가구조사 보고'에 따르면 친정 부모(21.9%)가 시부모(13.5%)보다 양육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친정 엄마(=외할머니)가 육아를 도와주는 게 아이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여성이 어린 나이부터 낳을 수 있을 때까지 아이를 낳던 예전에는 며느리 또는 딸과 시어머니 또는 친정 엄마가 엇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이들이 고부(姑婦) 관계냐 아니면 모녀(母女) 사이냐에 따라 아이들 생존율이 달라졌습니다.


핀란드 연구팀이 루터파 교회가 보유하고 있던 18∼19세기의 200여년간 출생 및 사망, 결혼 기록을 조사한 연구결과를 보면 (중략)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경우엔 그 아이들의 생존율이 50∼66% 떨어진 데 비해 엄마와 딸이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경우 생존율에 영향이 전혀 없었던 것. 모녀간에는 협력을 하지만 혈연적으로 관계가 없는 고부간에는 자신들의 아기를 위해 먹이 경쟁을 했다는 의미다. 

국민일보 '[사이언스 토크] 할머니 가설'


이 기사 제목이기도 한 '할머니 가설'은 인간 여성에게 폐경(閉經)이 찾아오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인간 여성은 보통 45~55세 사이에 폐경을 경험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도 수십 년을 더 삽니다.


반면 인간을 제외한 동물에게 폐경이 찾아오는 일은 드뭅니다. 심지어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영장류도 폐경이 뭔지 모릅니다.


침팬지가 인간보다 수명은 짧지만, 마지막 자식을 낳는 시기는 비슷하다. 수명 차이를 고려하면 침팬지는 아주 늙어서까지 새끼를 낳는 셈이고, 인간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데도 갑자기 중단하는 특별한 행태를 보인다.

생 영장류학자 김산하 박사(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


인간 여성은 서둘러 출산을 마치는 대신 손자 손녀 양육에 뛰어듭니다.


기본적으로 나이가 든 자신보다 젊은 딸(또는 며느리)이 나은 자손이 더 건강하게 마련입니다. 이들을 더욱 건강하게 돌보면 유전자를 더욱 널리 퍼뜨릴 수 있기 때문에 인간 여성은 늙어서까지 아이를 낳는 대신 폐경을 경험하게 된다는 주장이 바로 할머니 가설입니다.


바닷속을 헤엄치는 범고래떼. 동아일보DB


그렇다고 인간에게만 폐경이 찾아오는 건 아닙니다.


고래 네 종(들쇠고래 범고래 외뿔고래 흰돌고래)도 사람처럼 폐경을 경험합니다. 


지난해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대양에 사는 대형 돌고래로 고도의 사회적 행동을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새끼를 적게 낳고 오래 기르며 안정된 모계 집단 속에서 어미와 자식의 유대 관계가 굳건합니다. 인간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새끼 고래도 (외)할머니 고래로부터 도움을 받을까요? 적어도 범고래는 그렇습니다.


댄 프랭크스 박사가 이끄는 영국 요크대 연구진은 미국 워싱턴주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연안에 사는 범고래 두 그룹을 관찰한 뒤 "폐경기 이후 할머니 범고래가 손자 손녀 범고래 생존을 돕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연구진은 먼저 미국 고래연구센터와 캐나다 해양수산부에서 수집한 36년치 범고래 생존율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이와 함께 수중 카메라를 활용해 각 개체가 실제로 나이들어 가는 과정도 추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연구진은 외할머니가 있는 범고래 378마리를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숨을 거두고 나서 2년이 지났을 때 이 손자 손녀 범고래의 사망 확률은 그룹 내 다른 개체보다 4.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신들을 지켜주던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생존력이 떨어진 셈입니다.



프랭크스 박사는 "할머니 범고래는 '어려운 시절'이 찾아왔을 때 손자 손녀 범고래에게 '특별 보너스'를 제공하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야생에서 제일 '어려운 시절'은 역시 먹이가 부족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범고래가 제일 좋아하는 왕연어(chinook salom)가 부족한 때가 오면 할머니 범고래는 직접 연어를 잡아 손자 손녀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어디로 가면 연어가 많을지 알려주기도 합니다.


프랭크스 박사는 "진짜 중요한 건 연어가 아니라 할머니 범고래의 리더십이다. 할머니가 살면서 얻은 정보와 지혜를 손자, 소년에게 모두 제공하기 때문에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아, 역시 외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뭉클한 네 글자입니다.


이번 연구 결과는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SA)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댓글,

Currents | 카테고리 다른 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