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총명불여둔필
assignment Scribble/.OLD

Typical

첫 문장을 잊어 버렸다. 그게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문장이 떠올랐었는데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낮술을 먹고 한잠 자버린 탓이다.

왜 장터를 벌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단지 쥐가 불렀다는 이유로 나는 막걸리를 마셨다. 민중가요 몇 자락이 옆자리에서 불려지고 있었고 어정쩡한 계절의 오후답게 햇빛은 따가웠지만 바람은 조금 찼다. 절반은 반 팔, 절반은 긴 팔을 입은 그런 날씨. 해가 슬며시 관악산을 넘어갈 때 즈음 제사를 핑계대며 자리를 떴다. 앉아있을 때와는 다르게 일어서서는 취기가 조금 도는 게 느껴졌고, 햇빛이 따갑다는 게 얼굴 전체로 느껴졌다.

아마 그 순간에 그 문장이 떠올랐던 것도 같다.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그런 문장. 좌석버스를 타고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소설을 읽는 동안까지는 분명히 그 문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문장을 좀더 가다듬을까 궁리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마추어 웹진에서 오프라인으로 발간된 잡지책을 뒤적이던 동안까지도 어떻게 해서든 문장을 잊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 여름에 기껏 뺀 살 도로 다 찌고 있다는 엄마의 구박을 피해 컴퓨터를 켜고 결국 낮술 기운을 못 이겨 스르륵 잠이 들었다. 몇 시간 뒤 깨어났을 때 문장이 사라져 버릴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제사를 지내고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컴퓨터를 켜고 워드프로세서를 실행시킨 순간에까지는 어쩌면 그 문장이 아련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도 같다. 창을 열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냉장고를 뒤져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마루에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와 다시 키보드 앞에 않았을 때, 비로소 문장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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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고, 한 여자가 있다. 남자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말없이 담배만 피우고, 때로는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하다가 적당히 술에 취해 친구들과 헤어진다. 니가 내느니 내가 내느니 하는 작은 실랑이가 없었던 것 아니다. 하지만 그건 서로 내지 않겠다고 버티는 게 아니라 서로 내겠다고 싸우는 실랑이다. 아니, 아니다. 그런 건 아저씨들이나 하는 짓이다. 깔끔하게 서로 먹은 만큼씩 계산하거나, 누구 하나가 그의 신용카드로 모조리 긁어버린다. 요즘 누가 현금을 들고 다니냐, 며 자랑스레 카드를 뽑았을 것이고, 그의 친구들은 미안한 듯 잘 먹었다,는 말을 남긴다.

그렇게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에서 나온다. 한잔을 더하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남자는 혼자 남아 벤치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운다. 그리고는 일부러 막차 시간을 놓쳐 버린다. 정말 갈 곳이 없어진 남자는 지갑의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토사물과 취객으로 넘쳐나는 거리를 걷는다. 혼자 들어가 한잔 더 할까, 하는 생각이 간절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한다. 결국 처음 앉아있던 벤치로 돌아가게 되고, 여자네 집으로 가는 버스 노선을 확인하고 버스에 오른다.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 흘러가고 남자는 익숙한 정류장에 내려 익숙한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킨다. 담배 한 대를 더 피우고 지하도를 건너, 역시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다. 골목에서 꺽어져 언덕을 오르며 너무나 익숙한 가게 이름들을 소리내어 읽는다. 서울우유, 건우 다방, 하동 부동산, 복음사 세탁, 신일 정육점, 영상촌 비디오, 제일 미용실, 그리고 월드 마트.

서울우유 골목으로 들어가 지난 추억을 생각하며 남자는 잠깐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전봇대에 기대어 불이 켜진 여자의 방을 바라본다. 밝은 형광등, 열린 창문, 그리고 창가의 화분 두 개. 남자와 여자는 거기서 처음 입을 맞췄다. 동네를 천천히 걸어 놀이터 벤치에 앉는다. 둘이서는 늘 지나치기만 했던 놀이터, 남자는 그곳에서 새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지만, 그녀의 졸린 목소리에 잘 자,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연습장을 한 장 찢어 아무 것도 적지 않고 취한 손으로 엉성하게 편지지 접듯 종이를 접는다. 달랑 주소와 여자의 이름만 적은 종이를 남자는 여자네 집 우편함에 몰래 집어넣는다. 얕은 경사 아래의 우편함, 어쩌면 남자는 그 아래로 내려간 것이 처음이다. 남자가 엄지와 중지로 여자의 가녀린 턱을 잡고 장난칠 때 발을 동동 구르며 팔을 흔들던 여자의 모습이 살짝 오버랩된다.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비탈면을 오르면서 남자는 고개를 뒤로 돌린다. 그 앞에 서 있던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남자는 돌아서 길을 걷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뒤를 향해 손만 흔든다. 다시 골목길을 내려가며 남자는 몇 번이고 그 종이를 다시 꺼낼까 생각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오래된 신화의 한 구절,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아내가 돌이 된다. 신화의 주인공은 결국 아내를 돌로 만들었고, 자신의 음악을 잃었다.

다시 서울우유 골목에서 한참 동안 창문만 바라보다 목매여 나즈막히 여자의 이름을 불러본다. 남자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내게 돌아오길 바라는 건 아냐, 아니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 다만 진짜 니가 되길 바라는거야, 지금의 넌 자신을 추스리지도 못하고 있잖아. 남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안부를 제 멋대로 추측하며 엉뚱한 생각에 기어이 뒤를 한번 돌아본다.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과 그 소리를 잘 듣던 사람의 우정, 그리고 거문고 연주를 그만두게 만든 친구의 죽음.

남자는 그렇게 몇 시간이고 왜 자기가 거기 앉아있는지도 모를 때까지 거기 앉아서 담배만 피운다. 그 바람에 방에 불이 꺼지는 것도 몰랐다. 담뱃갑에 남은 담배를 통째로 구겨 버리며 남자는 언덕을 내려와 첫차를 타고 스르륵 잠이 든다.

남자가 눈을 떴을 때 버스는 이미 종점에 거의 다 온 뒤였다. 그제서야 겨우 피곤이 몰려왔고, 남자는 신호등에 걸리자 여기서 내려줄 수 없냐며 신호등 앞에서 내린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미국의 보복전에 관한 라디오 뉴스를 듣고,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새로 산다. 까끌한 입 속에 흩어지는 니코틴의 냄새.

자신의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잠이 들면서 남자는 취기를 핑계삼아 끊어버리는 전화라도 한 통 걸어볼 걸, 하고 후회를 한다. 몰라서 못 거는 게 아니라, 알아도 못 거는 여자의 새 전화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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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자버린 탓에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야구 게임을 열 시즌이 끝날 때까지 계속 했고, 게임을 통해 야구사의 거의 모든 기록들을 갈아 치웠다. 도중에 은이 양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고, 게임이 지겨울 즈음 수업 시간에 하릴없이 끄적인 낙서를 타이핑하기도 했다.

절반쯤 쳤을 때 영화를 하고 싶어하는 동생에게 전화가 걸려 왔고, 나는 그와 통화를 하는 동안 다섯 가치의 담배를 더 피웠다. 녀석은 자기가 쓴 시나리오의 시놉시스를 내게 들려줬고, 나는 그게 데니스는 통화중,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무슨 일인지 다음 날 다시 전화하겠다며 녀석이 전화를 끊었고,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와레즈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결국 야구 게임 하나를 받아서 실행을 했으나, 다른 건 다 되면서 정작 게임의 순간에는 모니터가 굳어 버리면서 실행이 되지 않아 몇 번을 더 시도하다 결국 지워버렸다.

야구장의 외야를 표현한 듯한 그래픽에 모니터가 굳어 버리는 순간, 나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앉았던, 혼자서만 반짝이는 관중석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어쩌면 처음 생각했던 그 문장이 기억날 것도 같았다. 맞다, '첫 문장을 잊어 버렸다.', 그것이 처음 생각했던 '첫 문장'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kini註 ────────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유일하게 궁금한 한 가지
정말 저런 쪽지를 넣었을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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