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총명불여둔필
assignment Scribble/.OLD

루시퍼의 사랑

사정을 시작했을 때였는지,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는지, 컴퓨터 스피커에서 쪽지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고, 창문 밖의 세상이 아래쪽으로 약간 휘어진 내 성기에서 정액을 실컷 받아먹고 있었다. 깨끗이 핥아.

창틀에 묻은 정액을 휴지로 닦아내 창 밖으로 집어던지고, 바지 앞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손가락 사이에 땀 때문에 담뱃대 일부가 젖어 버린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무거운 밤이었다. 존 굿맨이라도 지나가면서 그 굵은 목의 땀을 조그만 손수건으로 닦아내야 될 것 같은 그런 분위기 말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창 밖으로 담배 연기가 끈적하게 흩어진다. 세상 모두가 싸구려 퇴폐 찜질방 속에 들어앉은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얼굴에 찬 맥주병을 들이댄다. 단열이든 보온이든 어느 정도 열의 상태를 인간이 조절하게 됐다는 건 어느 면에서는 참 다행스런 일이다. 계절이나 기후, 날씨가 존재한다는 건 상당한 수고스러움과 번거스러움에 익숙해 져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여름에는 더워서 죽을 맛이고, 겨울에는 추워서 죽을 맛이다. 봄은 너무 질퍽하고, 가을은 너무 메마르다. 계절의 변화가 거의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부러워할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베토벤의 교향곡에 나오는 것처럼 신의 오묘한 솜씨라고 보기엔 우리들의 모진 말로는 표현될 가치도 없을 만큼 성가시고 귀찮은 것이다. 하지만 날씨가 사라진다면 중요한 화제 거리 하나를 잃는 셈이 되어 버릴 것 같다. 사실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서 날씨만큼 운을 떼기 좋은 화제 거리는 없다. 그리고 짜증은 더러 나지만 이미 몸도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조금씩 삶의 리듬을 조절하는 데 적응해 버렸다. 더위가 없다면 맥주가 이만큼 시원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맥주 병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역시 여름에는 시원한 맥주가 제격이다. 사정 후의 담배가 그렇듯 말이다. 담배 한 개비에 더 불을 붙이며 사춘기 계집아이의 젖가슴 같은 마우스를 움직여 쪽지를 확인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줄곧 붙어 다닌 녀석이었다. 릴레이 소설을 쓰자는 게 요지였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고등학교 수업시간 몰래 몇 단락씩은 번갈아 가며 낙서해 대던 버릇이 모처럼만에 생각난 모양이었다. 시간이 5년이나 흘렀어도 우리는 참 여전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여전히 지루했다.

맥주는 이미 식어 있었다. 병에 남은 맥주를 모두 마셔 버리고, 냉장고에 가서 다시 한 병을 꺼내왔다. 그 다음부터는 계속 클릭의 반복이었다. 사실 딱히 읽어야만 되는 글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하늘이 왜 파란색인줄 알아? 다른 색은 다 제 속에 품어 내면서도 파란색만은 끝까지 토해내기 때문이래. 웃기지? 그렇게 버려진 파란색이 결국 하늘을 대표하는 색이 되었으니… 하는 여기저기 인터넷 게시판들을 떠도는 글들을 읽으며, 유치하네,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긴 그래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어차피 나도 내가 토해내는 말들에 의해서만 내 존재를 증명 받을 뿐이니 말이다. 세상은 분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저 마다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다. 윈 앰프에서는 유명 댄스 그룹의 멤버들도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한 랩 구절이 흘러 나왔다. 좆삐리 삐리, 껍데기 떼기… 언행일치 안 되는 헛소리….

그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녀석의 글을 클릭하게 됐다. 두어 번 반복해서 읽어도 도무지 어떻게 이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녀석이 평소 즐기는 스타일로 보아 해서 시시껄렁한 연애담으로 써주면 될 것 같은데, 약간 술이 오른 상태에,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있을 전공 수업 걱정까지 하자면 그런 유치한 기분에 젖어서는 제대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몇 번을 더 읽으며, 무슨 짓을 해서 이을까,란 생각을 했다.

내용을 요약해서 쓸 자신이 없어서라기보다 귀찮아서 전문을 옮긴다고 말하면, 별 시건방진 놈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러하므로, 그냥 옮기자면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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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오늘도 나오지 않았다. 약속시간은 다 되어 가고, 나는 저쪽에서 웃으며 다가올 그녀를 꿈꾸며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 다가온 것은 일이 생겨서 못 온다는 그녀의 짧은 문자 메시지 하나. 수도 없이 생겼던 일. 새삼스러울 것도 없건만 답답한 맘에 동네 뒷산 정상에 올랐다. 등줄기를 가르는 한기에 내 몸도 마음과 같이 움츠려 든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벌써 가을이야. 참 서늘해졌지? 나한테도 불 좀 빌려주겠나?"

그는 내게 그렇게 다가 왔다. 한여름에도 비를 맞으면 약간의 한기는 들게 마련이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그는 8월 중순에 벌써 가을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이봐요, 아저씨 아직도 한참 더 더워야 한다구요, 하지만 소리는 담배 연기에 질식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성대에 딱 걸려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야경을 향한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아무 말도 담배만 태웠다. 이윽고,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자넨 악마를 믿는가?"

말 그대로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아직도 한참 더 더워야 하는 계절에 불쑥 나타나 가을 얘기를 꺼내더니 이제는 악마다. 하긴 한여름의 납량특집으로 악마만큼 좋은 소재도 드물다. 하지만 그건 공포 영화 속의 이야기일 뿐 실제로 그 존재를 믿어본 적은 없다.

"글쎄요."

"만일 자네가 사랑을 하고 있다면 자네는 이미 악마가 된 거나 다름없지. 사랑은 악마만이 할 수 있는 것이거든."

"무슨 말씀이신지?"

"이 세상이 생긴 이래 최초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혹시 알고 있는가?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사랑도 아니고 신께서 아들을 바라보시던 시선도 아니었다네. 최초의 사랑은 신을 향한 루시퍼의 마음이었지."

"아, 네. 그 이야기라면 들어 저도 봤어요."

루시퍼의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다. 날개가 찢긴 채로 천국에서 추방된 최초의 악마. 사랑은 악마만이 할 수 있다는 말도 잘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최초의 사랑이 악마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오히려 악마는 그러한 사랑을 믿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든가.

"루시퍼는 신만을 사랑하고 섬겼지만 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어. 모든 것의 창조자로서 그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밖에 여기지 않았어. 그러나 신의 그런 마음을 알고서도 루시퍼는 자신의 사랑을 거둘 수가 없었지. 그 결과는 날개를 잃고 지상으로 추방된 것이었고. 믿기지 않겠지만 그 루시퍼가 바로 나라네."

나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날씨 감각도 서툴고, 엉뚱하게도 악마 이야기를 꺼내더니, 이젠 자신이 바로 그 악마라는 것이다. 밤중에 정신병자를 만났다고 생각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너무나, 너무나, 내가 말해버리면 나조차도 울 것만 같을 정도로 슬퍼 보였다. 정말 진실이야, 믿어줘,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자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자네는 지금 나를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군.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악마는 신과는 달리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할 권리가 없거든.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게."

믿음이 크게 가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나는 그의 너무도 슬픈 눈빛 속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눈빛의 호소에 속아 넘어 간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나를 만들고 이렇게 말했지. '오, 사랑스러운 나의 루시퍼. 나의 첫 피조물, 이제부터 너는 내 옆에서 나를 위해 나를 따르고 나에게 복종하며 나만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를 안아 주었어. 태어나 처음으로 안긴 그의 품은 너무도 따스했고 편안했지. 나는 다짐했다네. 그만을 위해 살겠다고. 그리고 그가 6일 동안 이 세상을 만들 때 나는 그를 위해 노래하였고 7일째가 되면 어김없이 그의 품에 안겼었지. 그의 숨결이 나의 목선을 따라 흐르면, 어두운 7일째 밤도 첫 번째의 날보다 더 밝았으며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사라져 버렸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무한한 그의 능력에 새삼 감동하며 존경하며 놀라움으로 살았고 칠 일째 밤이면 느낄 수 있는 그의 숨결은 지친 나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곤 했다네. 그러던 중 나처럼 하얀 날개를 가진 형제들이 생겨났고 나에 대한 그의 관심은 뜸해져 버리고 말았지. 칠 일째 밤이 와도 십 사 일째 밤이 와도 그는 날 찾지 않았고 이십 일 일째 밤이 되어서야 그는 비로소 날 찾아 왔다네. 그의 품에 안겨 왜 이리 나를 멀리 하셨나이까 하고 여쭈었더니 그저 미소만 지으시더군. 그 미소만으로도 충분했어. 그러나 그가 일어나 첫 번째 날을 준비하려 하시자 나는 칠일이 될지도 십 사일이 될지도 모르는 그리움에 그를 뒤에서 안고 그의 목에 입을 맞추었지. 그 때 그 분은 호통을 치셨다네. 천한 피조물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느냐!, 하시며. 나는 울고 말았다네. … 왜 지루한가?"

"아, 아니오."

나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젖어 신문에서 읽었던 광고 문구 하나가 떠올랐다. 누가 말했던가, 자연이 신의 작품이라면, 도시는 인간의 작품이라고. 그리고는 어처구니없게도 신이란 단어에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바보 같게도.

"그 때부터 나는 생각했지, 그는 그의 피조물을 보며, 아니 피조물들의 복종을 보며 즐기고 있었던 거라고. 그 때부터 나는 인간들에게 보다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것, 그리고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다네. 그러자 신을 등지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급기야 신은 불로 그들을 벌하였고 동시에 나는 그에게 날개를 찢기고 지상으로 내팽개쳐졌지. 그 후로 사람들은 나를 악마라고 부르더군."

흐트러진 말투로 말을 마치며 그는 눈물지었다. 나도 모르게 난 그를 꼭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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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였다. 몇 번 안 읽어봐도 사실 뻔한 내용이었다. 다만 고등학교 때의 그것보다는 좀더 신경을 쓴 듯 보여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써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굳이 바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게시물 작성 창을 열어 놓고 몇 줄 나가는가 싶다가도 금방 취소해 버리고, 다시 몇 줄 쓰다가 잘라내기를 몇 번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다음에 쓰지 뭐, 하는 결론에 다다랐고 이런저런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야사나 몇 개 클릭 해 보고, 동창회 사이트의 유행에 맞춰 초등학교 동창생을 강간하는 내용을 그린 야설의 문화적 적응 능력에 비웃음 치다가, 그냥 잠에 들려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어쩌면 그때 한번 더 자위행위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 창 밖을 향해 정액을 내뱉어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느닷없이 귓가에 '용케도 잘 찾아왔군.'이란 말이 들렸고, 담배가 끼워진 오른손가락 사이부터 팔에 소름이 쫙 돋는 게 느껴졌다. 몸의 반응이 너무도 순간적이고 갑작스러워서 단지 잘못 들었을 뿐인 거라고 치부해 버릴 수가 없었다. 제길, 가위라도 눌릴 징조인지.

사실 태어나서 가위에 눌려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건 지금까지도 그렇다. 내게는 가위라는 말조차 여전히 낯선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늘 가위에 한번 눌려 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처럼 다만 가위눌림이라는 낯선 것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긴 했다. 그래서 그 아주 작은 낌새에도 난 잠깐 동안이나마 가위눌림에 대한 기대감이 폭발 직전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별 수 없게도 숱한 이들이 늘어놓던 가위눌림의 공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일어나 컴퓨터를 켰고, 모니터 우측 하단의 시계는 오전 네 시 사십 오 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차피 자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고, 늘 그랬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망상이나 하고 있기에는 좀 전의 가위눌림에 대한 공포가 남아있었다. 다시 이런저런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다가 끝내는 녀석이 남긴 글을 다시 클릭하게 됐다. 결국 써지지도 않는 글을 붙들고 끄적끄적 겨우 글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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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신에게 안겨있던 때의 느낌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의 품은 악마의 그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따스했다. 주전자가 제 온기를 이기지 못하고 수증기를 내뿜듯 그의 눈물 또한 그의 온기를 견디어 내지 못하는 슬픔들의 뒤늦은 탈출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는 울고 있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따뜻함에 겨워 스스로 차가워지려 하고 있던 것이었다. 차가움을 느낄 수 있는 자만이 따뜻함도 알 수 있다는 듯이 그는 3류 배우의 연기처럼 어색하게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악마라고 해서 너무 두려워 말게나. 사실 난 한번도 내가 악마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다네. 어차피 악이라는 건 하느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거절됨으로써 생겨난 것뿐이거든. 그래, 사람들이 부르는 악이라는 건 그를 선이라고 전제할 때에만 성립될 수가 있는 게 아니겠나?

하지만 나와 그뿐일 때에는, 그리고 모두가, 나조차, 그의 말을 잘 따르고 있을 때엔 악이라는 말조차 생겨날 필요가 없었지. 악이라는 말이 생기고 나서 악이 생겨난 게 아니라, 악이 먼저 생기고 난 뒤에야 악이라는 말도 생길 수가 있었던 거일 테니까 말이네. 그러니 사실 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의 결과일 뿐이라네.

사랑? 아니지, 내가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던 것의 결과였겠지. 사실 내 날개가 찢겨 나가는 그 고통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얼마나 무모했던 것인지. 난 그저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뿐이고,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이란 사실을 애써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네.

난 한번도 인간들에게 신을 등지라고 가르친 적은 없네.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가르치려 했던 건 사랑을 하는 법이었네. 사랑이란 놈은 신과의 관계가 아닌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라고 말이지. 어쩌면 나 혼자만이 신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이기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이기심 때문이었다구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기심마저 포용하시는 분이 아니던가요? 전 아직까지 그분이 언제나 사랑을 앞세우시는 분이라고 생각해왔는데요. 그런 이기심마저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그분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아닌가요?"

"글쎄, 그건 말하자면 사랑이라기보다 하나의 복종, 그래, 충성심의 표현에 대한 응답 같은 거겠지. 그가 그렇게 너그럽다고 치자면야 그는 악 또한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니겠나?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깨닫고 있지 못하는 사실은 하나님은 그리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야. 그들은 그걸 감추기 위해 오히려 그가 한번도 말하지 않았던 전지전능함이란 것마저 만들어 냈지.

아니, 사람들이 말하는 전지전능함이란 때론 선이라는 범위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해석되기에 문제가 생겨나는 것인지도 몰라. 성경에 씌어있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본 떠서 사람들을 만들었다네. 결국 사람이 완벽하지 않다는 건 곧 그 또한 완벽하지가 못하다는 거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악한 구석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도 악할 수 있다는 증거라네.

만약 어떤 의미에서든 그가 정말 모든 걸 알고 있고, 모든 걸 할 수 있다면, 나를 처음 만들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내가 이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겠지. 아니, 생각해 보면 그는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는 어쩌면 작은 실험을 감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거네. 그래, 그는 악을 실험해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악을 실험해 본다구요?"

악을 실험한다는 그의 말에 나는 섬짓 놀랐다.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유치원 때부터 줄곧 성당과 가까운 인연을 맺기는 했지만, 사실 내 머릿속에서 신이, 그것도 기독교적인 하느님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반-기독교적인 사상에 물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위선과 독선에 치를 떨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네들의 선행은 내겐 그저 가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유일신 하느님이 선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실험해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 악이란 무엇인가를 그는 나를 통해 실험을 하고 있는 셈이지. 하지만 그는 이미 결과는 알고 있다네. 정말 그가 전지전능하다면 말이지. 미리 알고 있는 답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아니, 그가 즐거워하고 있으리란 사실마저 미리 알고 있었겠지. 정말이지, 그가 모든 걸 알고 있고, 모든 걸 할 수 있다면 말이네. 그는 실험의 결과를 바꿀 수도 있고, 자기가 언젠가 이것을 이렇게 바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지도 모르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모든 걸 할 수 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으니 난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네. 내가 이 정도밖에 못된다는 것조차 그는 이미 알고 있을 거고, 어차피 다 그가 이렇게 만든 것일 테니 말이네."

"그럼 여전히 당신 또한 신의 전지전능함을 믿는 것인가요?"

"아니, 애써 믿으려 하고 있는 거지. 난 창조의 모든 과정부터 지금껏 그의 곁에 있은 유일한 존재라네. 어쩌면 그는 일부러 나의 존재를 즐기는 지도 몰라. 만일, 내가 창조의 과정에 대해 발설한다면 아마 그를 믿는 사람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지도 몰라. 하지만 어쩐지 내가 아무리 말하려 해도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네. 어쩌면 그것 또한 그의 조종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뿐이네. 그래, 눈치챘겠지만 아직도 그가 내게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관심의 끈을 놓치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 이것 또한 철저히 그의 계획에 의한 것일는지 몰라도."

"왜 그렇게 아직도 모든 걸 그에게로 돌리죠? 당신은 자유 의지를 믿지 않나요?"

"자유의지?"

그는 1차대전의 발발을 알리던 작은 총성처럼 조용하게 그러나 곧 유럽전역을 뒤흔든 나치의 포성처럼 커다랗게 웃고 있었다. 사실 네비게이토 같은 급진적인 선교 단체의 일원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내가 자주 사용하던 거절 방식이 자유의지였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이상 신을 믿고 믿지 않을 자유와 권리는 내게 있다는 항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작 축구 같은 것 때문에 전쟁을 벌였단 말이야, 하고 비웃기라도 한다는 듯 내 입에서 튀어나온 자유의지를 비웃고 있었다.

"그런 유치한 말장난은 삼가게. 보아 하니 자네도 성경은 꽤나 읽은 모양이군 그래. 아직도 그가 우리에게 그렇게 엄청난 능력을 부여해줬을 거라고 믿고 있는 겐가? 그 말을 처음 생각해 낸 건 나였다네. 그래, 그에게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던 내 스스로의 존재에 작은 위안을 주기 위해, 아직도 날 할퀴기만 하는 그에 대한 사랑을 안고 사는 나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난 그렇게 떠벌리고 다녔다네. 그래, 신을 떠나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 내고 싶었던 거겠지. 하지만 아니라네. 자유의지를 부르짖으면 부르짖을수록 난 더더욱 그가 날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네. 잊었는가? 난 창조부터 유일하게 그와 함께 한 존재라네. 내가 알지 못하는 건 그가 어떻게 나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뿐이라네. 내가 그의 말씀에서 비롯된 최초의 존재이기 때문이지. 그러나 나는 다 안다네. 그가 처음 창조에 쓰고 싶던 무기는 결코 선이 아닌 악이었다는 걸 말이지. 못 믿겠나? 그렇다면 어찌 그가 날 처음 만들 수가 있었겠나? 거듭 말하지만 그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고, 모든 걸 할 수 있다네."

신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그의 생각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하긴, 신이 정말 전지전능하다면 내가 교회를 다니게 할 수 있을 테니, 언젠가 신이 원할 때가 되면 교회에 다니게 될 거라고 선교사에서 쏘아붙였던 기억도 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전지전능이라는 낱말을 사용한 것이라면 그는 전지전능함을 비웃는 것이 된다. 자유의지와 전지전능함 모두를 동시에 비웃는 것이다. 확신인지 조롱인지 나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를 사랑하게 만든 것조차 그였다는 말인가요?"

"아니지, 사실 내가 진정 사랑했던 건 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네. 모르겠나? 그는 날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내가 그를 만들었다네. 아니, 우린 서로가 서로를 만들었지. 내가 그의 피조물이듯 그 또한 나의 피조물이라네. 그가 어떻게 날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듯 그 또한 내가 어떻게 그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네. 생각해 보게나, 처음 그가 있었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서로가 서로를 만들었다. 악마가 신의 피조물이듯, 신 또한 악마의 피조물이란 말인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골 때리는 논쟁이라도 시작하려는 것 같아서 순간 혼란스러웠다.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어떻게 당신이 그를 만들고 그가 당신을 만들 수가 있죠?"

"자넨 창조라는 걸 믿는가?"

"아뇨, 사실 전 기독교와는 좀 거리가 멀어서요. 사실 전 진화론을 믿습니다."

사실은 창조론 진화론 논쟁 같은 것엔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미션 스쿨을 나온 탓에 과학 시간에 배우는 진화론과는 별도로 성경 시간이면 어김없이 창조론을 주입 받았다. 양쪽을 동시에 접하다 보니 한 가지 이론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서로 메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창조는 왠지 헛소리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창조의 순간에 있어 보지는 못했던 만큼, 태초가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창조 이후 진화가 이뤄졌다고 믿는 축이었다.

"아니, 내가 말하려던 건 진화론, 창조론에서 말하는 창조가 아니라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과정, 그 창조를 말하는 것이라네. 자넨 어떻게 세상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빅뱅 아닌가요?"

"그래, 알고 있군 그래. 그럼 빅뱅을 일으킨 원인이 무어라고 생각하나?"

"어, 확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확률이라, 어서 계속해 보게나."

"그러니까, 정말 수 천억 분의 일의 확률로 인해 그 속에 시공이라는 게 생겨나게 되고, 다시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게 되고, 팽창을 계속해 오늘의 우주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주는 팽창을 계속한다고 배웠습니다."

"음, 그래 아주 모르지는 않는구만, 아니 오히려 잘 알고 있는 편인 것 같네. 그렇지만 자네가 모르는 게 있네. 빅뱅이 일어나는 공간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나?"

"블랙홀 비슷한 뭐, 그런 거 아닌가요?"

"음, 이를테면 그런 곳이지. 그 어떤 물리 법칙도 적용되지 않는 공간. 그렇다면 어떤 물리법칙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확률이라는 수학적 가치가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우주는 결코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관찰의 대상이 될 뿐이다, 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도 같다. 그때 그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 들였던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순간 우주에서 악을 실험한다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수학적 가치, 그리고 확률. 악은 그런 방식으로 실험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 글쎄요."

"정답은 아니라네. 이 우주는 누가 만든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도 아니라네. 우주는 처음부터 그저 우주였을 뿐이야. 그건 사람들이 하느님이라 부르는 자가 만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만든 건 더더욱 아니라네.

거긴 처음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지금처럼 산도 바다도 동물들도 뛰어 노는 곳이었다네.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이라도 창세기를 뒤져보게. 거기엔 어디에도 하늘과 별에 대한 언급은 나와있질 않다네. 그건 그가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이지. 그래, 태초라는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아.

자네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언제부터 그곳에서 길러졌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라네, 그들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그냥 그곳에 있던 것뿐이야. 그들이 누군가로부터 그게 언제였는지를 듣게 된다면 아마 알 수 있게 되겠지.
 
태초라는 것도 그런 거라네. 그저 언제부턴가 태초라는 게 있었다고 사람들이 말해오기에 그저 그렇게 믿는 것뿐이라네. 그와 나 또한 그랬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있었고, 그리고 그가 있었네. 그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고, 그가 나를 만들었다고 했지. 그러나 그건 알 수 없네. 내가 그를 만든 건지, 그가 나를 만든 건지. 그저 그가 처음 내게 건넨 말에 속아 그가 나를 만들었다 믿고 있는 건지도 몰라. 적어도 그에겐 그 정도의 능력은 있으니 말일세."

서로가 서로를 만들었다는 아까 그의 말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도 같았다. 하나의 존재 증명은 필연적으로 다른 하나의 존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말조차 실은 다른 말의 존재에 의해서만 그 의미를 부여받는다. 상호 작용이 존재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재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변증법도 결국엔 스스로 원인이 되는 자기원인이 있다는 어설픈 별명으로 애써 최초의 원인을 만들어 낼뿐이다. 아마 거기서 얘기하는 최초의 원인이란 신이었던 것 같다. 그는 지금 함부로 자기 원인의 정의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비롯된 최초의 원인, 창조의 원인 말이다.

"그럼 당신이 알고 있다는 창조의 비밀이 이것인가요?"

"비슷하긴 하지만 아니라네. 그는 분명 세상을 창조했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내 앞서 말하지 않았나 그와 함께 창조의 과정을 함께 했다고. 그는 분명 세상을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네. 하지만 성경에 씌어져 있는 대로는 아니라네.

그가 세상을 창조하게 된 건 그가 내게 세상을 창조했다고 처음 말했기 때문일세. 어쩌면 내가 그를 너무 완벽하게 만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가 전지전능하기에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이 세상을 만들었다 말할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지전능하게 된 거라네. 알겠나? 세상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었다고 우리가 믿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에 그가 만든 것이 되어버렸다는 말일세.

우리는 그걸 의심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 지금 우리가 여기서 나누고 있는 말들을 엿들으며 키득키득 웃고 있을 존재가 바로 그라는 말일세. 그가 나를 내팽개쳤던 이유는 아마 그뿐만이 아니라 나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는 어쩌면 이 사실을 그가 만든 세상에서 몇몇 사람들에게는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야. 말하지 않았는가, 그의 실험을."

어쩌면 우주는 실험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신이 퍼뜨린 소문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만이 우주를 악의 실험 장소로 독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전지전능함을 받아들인다면, 실험 결과쯤은 뻔히 알고 있을 터인데도 그렇게 욕심쟁이가 될 필요까지 있던 걸까. 자기 이외에는 그 누구도 숭배하지 말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 그렇게 감추지 않고서는 못 배길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꼭두각시 노릇을 계속하고 있는 거죠? 그 또한 그의 뜻인가요?"

"이제야 이해를 하는 모양이군. 세상 모든 건 다 그의 뜻이라네. 하지만 이걸 잊지 말게. 그의 뜻은 모두 나의 뜻이라네. 그를 내가 만들었기 때문이지."

로마를 불지르고 좋아라 보고 있던 네로 황제 같은 광기 어린 모습의 신을 상상하며, 그의 발톱 끝에 때까지 핥아줄 법한 시중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지금 내 눈앞의 이 남자가 사실은 황제를 그렇게 미쳐가도록 조장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독재자는 결코 혼자의 의지만으로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신의 뜻을 내세워 제멋대로 행동하고는 신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대통령의 차남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서 그가 악마라 스스로 자처하고 나서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네는 왜 성경엔 내가 아닌 아담과 이브가 최초의 사람으로 나오는지 아는가?"

"그건, 당신이 악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내 말에 수긍하는 듯 하더니, 이내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담과 이브가 최초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와는 달리 나는 이런저런 원인들과 호모로 시작하는 학명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뿐이었다. 동시에 탄소 동위 원소 측정법의 오류를 내세워 창조론을 주장하던 성경 시간의 비디오 화면이 오버랩 됐다. 그 어디서도 악마가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신이 모든 사물에게 일일이 이름을 주었듯,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랬다면, 그리고 그 과정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면, 결코 악마와 사람에게 똑같은 이름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신이 악을 실험하고 있다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가 자네가 잘못생각하기를 바랬나보군 그래. 미안하지만 틀렸다네. 성경은 결코 그가 쓴 것이 아니라네. 그건 그에 대한 충성을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강요하기 위해 그가 사람들에게 쓰라고 시킨 것뿐이지.

그는 분명 알았을 거라네. 성경이 어떻게 쓰여질지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리란 사실조차 말이지. 바벨탑이 무너져 버린 순간 성경의 언어도 갈라져 저마다 다른 뜻으로 자기의 말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물론 알고 있었겠지.

그의 말이 적힌 책이라고는 하지만 성경에는 수도 없는 오류가 있다네. 그건 그가 자신을 본 떠 사람들에게 쓰라고 시켜서 적게 한 내용들이기 때문이지. 그의 오류는 곧 사람의 오류고, 그 오류는 곧 성경의 오류라는 말이네.

그는 그걸 알면서 좋아하고 있는 거라네.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통해 아담과 이브 이전에 존재했던 인류의 흔적을 증명해 낼 수 있으리란 사실조차 말이지. 그는 단지 자기를 온전히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던 거라네.

말하자면 아담과 이브 이전의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 아니, 그들을 그렇게 깨닫게 하려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 자신을 믿는 자만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거라네. 그들이 왜 그렇게 쓰디쓴 벌을 받아야만 했는지, 왜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핑계를 대고 싶었던 거라네.

바로 그가 처음 입을 열기 전의 나에게 말이지.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던 시점의 나에 대해 말이지. 그가 생겨나지 이전의 나에 대해 미리 변명해 두려 했던 거라네. 그가 내게 처음 말을 건네기 전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선 잊어 달라고 부탁을 해두었던 거라 말이네."

"그는 그것조차 미리 알고 있다는 뜻인가요?"

"벌써 잊었는가, 그는 미리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지. 그건 그를 만든 이후의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없고, 유일하게 알 수 없는 건 그를 만들기 이전의 나에 대해서라네. 말했지 않은가? 그가 알고 있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를 만든 이후의 일이라고. 어쩌면 지금쯤은 눈치를 채고 슬슬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는 또 별일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일 테지. 이런 일이 일어날 것 또한 미리 알고 있었을 테고 이것 또한 그가 내게 시키고 있는 일일 테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여전히 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신의 전지전능함을 아무리 광신하다 해도 이렇게 모든 일을 신의 뜻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만이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독실한 크리스천인지도 모른다.

"자네 아직도 빅뱅은 기억하고 있겠지?"

"네,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그럼, 확률뿐만이 아니라 시간 또한 물리법칙에 속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나?"

"그렇습니다만."

"좋네, 그럼 그 속에서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눈다는 것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겠나?"

"네?"

"시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전과 그 후가 있겠느냐고 묻는 걸세."

"글쎄요."

"자넨 아직도 깨닫지 못했군, 그래, 하지만 어쩌겠나, 그것 또한 모두 그의 뜻일 테니 말야. 자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불 좀 빌려주게. 자네도 한 대 더 피우지 그러나."

그는 내 라이터를 뺏어서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내 담배에도 불을 붙여 주었다. 정말 이제부터는 가을이 될 모양이야,라는 그의 말에 대꾸를 하려는 순간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타날 때 그랬듯 사라질 때도 갑작스러웠다. 아니, 진정 그와 함께 했던 건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의심이 진행되면 될수록 오히려 내게는 확신 같은 것이 더욱 강하게 찾아들었다.

어쩌면 그저 처음 생각했던 대로 미친 사람에게 헛소리를 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벽의 지하철에도 시사, 정치, 경제 문제 같은 주제들을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노숙자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네들의 말에서 이런 정도의 확신을 얻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는 그네들과 다르게, 마치 휴전 협정이 체결되는 동안에도 한 뼘의 땅이나마 더 얻기 위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사병들처럼, 그는 필사적으로 내게 무언가를 남겨주고 떠나려하는 것 같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기에 쉽사리 그를 다만 미친 사람이라고만 한정지을 수는 없었다. 하긴, 그래봤자 나 역시 죽어 가는 사병들의 목숨엔 아랑곳없이 그다지 필요치 않은 탁상공론으로 시간만 질질 끄는 어리석은 협상 테이블에 앉은 인정머리 없는 장군일 뿐이었다.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눈으로는 더욱 열심히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지도 모를 그녀의 모습을 애타게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남기고 간 미묘한 말들 속에 가장 빠른 포기의 방법을 찾았던 것도 같다. 이것 또한 모두 신의 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버리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신이여, 정말 전지전능하다면 그녀를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나게 하소서. 두 눈을 감은 채 깍지 긴 손 사이로 나즈막히 목소리를 내뱉었지만 역시 그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었다. 그래도 기도했던 짧은 시간이나마 기다림의 시간이 연장되어 좀더 오래 기대를 품을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절망의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생각해 버리지 않고, 기대를 들먹인 것 역시 그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젠 나마저 정말 미쳤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식하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 올라 올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이제부터 새로 기다리라고 해도 기다릴 수 있을 것처럼 주변은 얼마 전과 너무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동안 이따금 눈에 들어오던 인적도 모두 끊겨 있었다. 그러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나눈 이야기의 양을 감안할 때 시간은 이미 한참이 흘렀을 것이고, 그 밤중에 산 속에 있는 공원을 찾을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이다.
 
결국 기나긴 기다림 끝에 역시 허탕이라는 갑갑한 마음에 담배 갑을 살폈다. 담배 갑은 제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에는 달랑 마지막 한 개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거나 마저 피고 내려가자, 며 마지막 개비에 불을 붙이다,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순간 흠짓 놀라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시 한번 액정 화면을 쳐다봤다. 처음 공원에 올라 왔을 때의 시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처음엔 고장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전화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바로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저 음성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고, 액정에는 메시지 도착 시간이 표시되어 있던 것뿐이었다. 그와 너무 오래 이야기를 나눈 나머지 신경 전체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끝끝내 결론을 제시하지 않고 신의 뜻으로 얼버무린 그의 마지막 말에 미련이 남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담배 불똥을 튀기며, 아닐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쩌면 미안하다는 그녀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마쯤은 기대감을 안고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다.

"새로운 음성 메시지 1개가 도착되었습니다, 음성 메시지 확인은 1번, 뚜"

예상대로 그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대신 다음과 같은 짧은 한마디만이 녹음되어 있었다.

"빛이 생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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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 버튼을 누른 뒤 몇 번을 더 읽었다. 통신 게시판에 올라갈 릴레이 소설로는 좀 지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대로 길게는 썼으니 녀석이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하고 말아 버렸다. 한번을 더 읽으며 어색한 부분을 손질했지만 여전히 어색하긴 마찬가지였고, 녀석의 기대와는 엉뚱한 방향으로 써버린 것 같아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새로 고쳐 쓰기에 머리는 이미 너무 무거웠다.

기지개를 켜며 습관적으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벽시계가 가르키는 눈금을 쳐다보다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시침과 분침이 여전히 150도의 각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시 사십 오 분. 그러나 여전히 내게도 아무 것도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까지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바로 초침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건전지의 수명이 다해버린 시계였던 것이다. 하필이면 하루에 고작 두 번 맞는 시각에 우연히 걸려든 것뿐이었다. 모니터 아래 항상 켜져 있는 시계를 놔두고 벽시계를 바라 본 것이 실수였다.

나 또한 글을 쓰면서 미쳐버린 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고, 역시 피식 한번 더 웃음을 흘리면서 전송 버튼을 클릭했다. 상황 표시 막대가 한참을 올라가더니 전송 완료 창이 떴다. 제대로 올라갔는지 확인하려 게시물을 클릭하는 순간 게시물 크기가 마이너스 34581kb로 되어 있었다. 물론, 글도 나타나지 않았다. 미리 저장해 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전송 버튼을 누르는데 이번에는 서버 오류가 났다. 원래가 마이너스 본문 크기나 서버 오류 같은 경우가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한번 더 글을 불러 와 전송 버튼을 누르는데 이번에도 서버 오류가 났다.

취소 버튼을 클릭하면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꾸 나도 모르게 신의 뜻,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빌어먹을. 한번 더 시도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순간 뒷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고개를 등뒤로 돌려 봤지만 역시나 망막에 맺히는 것은 적당히 색이 바랜 벽지일 뿐이었다. 다시 한번 전송 버튼을 클릭하며 이번에 글이 정상적으로 올라가 주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성공이었다. 결국 네 번의 시도 끝에 글은 제대로 올라갔고, 본문 크기도 15kb로 정상이었다.   

별 게 다 속 썩이네,라고 중얼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서야 안심이라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게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혹은 그게 악마가 됐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존재에 관한 인간의 공포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공포는 결국 그 존재에의 의지로 바뀌어 버리는지도 모를 모양이다. 어쨌든 사람은 계절 변화에도 짜증을 부릴 만큼 나약한 존재이고,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자기가 실컷 내뱉은 말들에 의해 스스로 불안해지는 자신이 안쓰럽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그건 다만 어느 것에 자신의 존재 증명을 맡기느냐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글 속의 루시퍼가 신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 받고, 그런 신에 공포를 느꼈던 것처럼 나는 나를 믿고 지껄인 말에 스스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런 공포의 실재가 사실은 별 것 아님을 알게 됐을 때는 오히려 만만한 적의만 남게 마련이었다. 아무리 공모와 공포로 가득 찬 세상 속을 산다고 해도 사실은 나 역시 그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일 뿐일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마다 인간다운 척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너무도 비인간적이다.

쓰기 창을 하나 더 열고 어디다 가져다 붙이기에도 뭣한 다음과 같은 짧은 문단 하나를 써나갔다.
 

그래, 신의 뜻대로 만들어진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아니 피조물로서의 세상을 나의 가슴에 담아 놓는다는 것, 제길 짜증날 정도로 유치해 구역질을 샘솟게 만드는. 그래, 예수 자식이 날 죽이지 못한다면 내가 예수 새끼를 죽일 테다. 바보 예수를 맹신하는 버러지 예수 바보들. 하지만 믿으시게, 그리하면 너와 너희집이 구원을 얻을지니. 내게 구원은 다만 김병현의 세이브 포인트 하나.

세상은 다만 내 정액을 받아먹은 핸드폰 음성 메시지가 뱉어낸 토사물일 뿐이다. 나는 그 날 밤의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모를 자위를 한번 더 했다.


─── kini註 ────────

옛날에 쓴 글은 참 뭐라고 해야 할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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