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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傳 -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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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태어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전주 이씨로 조선 왕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돼 한성 감옥에 갇혔다. 1월 30일 탈옥을 시도했지만 다시 붙잡혔고 7월 11일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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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 영어 성경으로 틈틈이 영어 공부를 했고 영한 사전도 만들려 했다. 그는 이때 '독립정신'이라는 책도 펴냈다. 이승만이 풀려난 건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 이해 8월에 풀려난 이승만은 11월 특사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1월 워싱턴 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고, 8월 하와이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만났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는데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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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사 활동이 실패로 끝나자 이승만은 2월 편입한 조지워싱턴대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2년만에 학사 학위를 딴 이승만은 하버드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10년에는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 교포 장인환 전명운이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저격한 사건이 있었다. 교포들은 이 사건 재판 통역을 이승만에게 부탁했지만 이승만은 거절했다.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들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듬해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哈爾濱)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을 때도 이승만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력으로는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이승만은 반일을 넘어 보편적 인류애를 갖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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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910년 귀국해 YMCA 강사로 일하다 191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1913년 하와이 호놀루루에 정착했다. 그해 8월에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던 '한인기숙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하와이에서 발판을 마련한 이승만은 활발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8년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고 이듬해 3월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도 이승만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으로 뽑았다. 이승만은 같은해 4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9월에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대통령)으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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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는 데는 미국 윌슨 대통령이 프린스턴대 총장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이 탄핵시킬 때까지 임시정부 대통령 자리를 유지했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승만은 미국에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맡아 활동했다. 중경 임시정부는 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을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이승만은 1942년 6월 13일 라디오 방송 '미국의 소리'를 통해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있다"는 내용을 한반도에 전했다. 이 방송 내용은 입에서 입을 통해 국민들에게 널리 퍼졌고 이승만은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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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면서 이승만은 귀국을 서둘렀다. 이승만은 중경 임시정부 사람들보다 앞서 10월 16일 서울에 도착했고 17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구와 중경 임시 정부 사람들은 11월 23일 귀국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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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이승만은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귀국 초기에는 순탄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남한 단독 정부 구성 문제를 두고 이견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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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은 이승만 편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은 이승만을 '대표적 혁명가'도 '양심적인 지도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은 이승만을 1위로 꼽았다. 김구도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는 의견에서 한 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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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은 김구를 누르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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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3·15 부정선거로 4월 26일 사임할 때까지 계속해 2, 3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 사임 후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숨졌다.

우리 세대에게 이승만은 악(惡)이다. 그 반대 지점에서 김구는 늘 선(善)이다. KBS에서 지난해 방영한 이 다큐멘터리도 이승만을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각으로 그린다.  그러나 건국에 대한 비전은 김구보다 이승만이 한 발 앞서 있었던 건 아닐까? 한 마디로 슬픈 역사를 다룬 슬픈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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