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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을 읽읍시다 #37 나쁜 정치 속에서의 발전


1986년 11월 12일자 '오늘과 내일'. 제 부족한 설명 대신 전문을 읽어보시라. 특히 펜 기자 지망생 여러분은 두 번 읽으시라고 추천.

숙명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사회 국가 민족도 인간의 지성(至聖)과 인간다운 인격의 연마로 창조해가는 것임을 믿는 백성으로서는 요새 같이 외로울 수 없다. 결국 이 땅의 정치는 과거의 모양이 그랬듯이 비극으로 끝나는 게 숙명인가 하는 회의. 되어 가는 꼴을 보면 그럴 모양인데 그런 숙명을 거부하며 발전과 창조를 이루는 길은 정말 막힌 것일까.

민족과 문화의 역사는 길되 공화국으로서의 독립의 역사는 짧은 이 나라 정치가 선진국이나 후진국에 비해 쉽지 않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로되, 이제 40세의 장년으로서 시행착오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더구나 기술 기능 기업 예술 스포츠 등 민간 부분에서는 좁은 땅의 4000만으로서도 50억 인류의 세계를 무대로 거장들을 배출하고 있는 발랄한 백성을 갖고 어째서 정치는 후진국의 유치한 작태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요새 한반도의 행운(行運)을 보면 마치 후진 유치한 정치권력 왕국이 따로 있고 선진을 넘보는 민간공화국 따로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정치가 좋아지기를 기대하지 말고 아예 나쁜 정치를 전제하고 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킬 방도를 궁리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발상마저 하게 된다. 정치발전 없는 국가 발전이란 정상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나, 따지고 보면 해방 후의 이 나라 발전에서 언제는 좋은 정치 있어 봤는가 하고 실적을 반추해 보면 정치 기대하지 말고 살아나는 것이 백성의 마음먹기로는 차라리 편할 것이다.

밖에서 망원경으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은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최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지(誌)는 2032년, 즉 48년 뒤에 한국의 1인당 GNP는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고 썼다. 분석했다기보다 썼다는 뜻은 미국이 앞으로 연 2%씩 크고 한국이 6.5%씩 크면 그리된다는 산술 계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가능성을 예상하기에 그런 계산도 하는 것이다. 25년 전 미국의 4분의 1에 불과하던 일본의 1인당 소득이 금년에는 미국을 앞질러 1만7000 달러에 이른 실적을 보면 한국의 가능성을 주목한다는 것이다.

영국 사람보다 배나 더 낙관적인 사람은 대만 출신의 일본인 문평 비평가인 샤세키(謝世輝) 교수이다. 그는 딱 잘라 2010년에는 한국이 일본을 능가한다고 예측한다. 미국을 능가한 일본을 한국이 능가한다니까 우리는 선진 중에서도 최선진이 되는 것인데 지금부터 24년 뒤라고 확신한다. 일본의 특이한 천재적 지성이요 '지가(知價)혁명' 주창자인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는 한국 경제의 최대 고질인 대일 무역 적자도 5~6년 내에 흑자로 전환한다고 진단한다. 정부의 1991년 20억 달러 적자 계획보다도 낙관적이다.

이들 논거의 공통점은 일본이 이미 미국을 따라 잡은 동력이 바로 한국에도 있고 몇 가지 취약점은 있으나 이 성장 동력이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앞으로 약해져 가는데 한국은 지속적으로 커진다는 데 있다. 이 진단은 민간의 활력을 보면 진실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요새 자동차, 전차, 소재, 조선, 화학, 섬유 등의 산업적 기술적 혁신은 하루가 다르고 1년이면 세계랭킹을 몇 계단씩 껑충껑충 뛰고 있다. 세계가 좁게 보일 정도이다. 그 의미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시골에서 쓰고 있는 TDX 전화교환기는 선진 중의 선진에 속하는 것으로 갑자기 전화가 남아도는 것은 이 교환기 기술 혁명 때문이다. 특히 TDX는 컴퓨터와 연결된 통신정보혁명을 유럽보다 더 가속시킬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셈이다. 정보화 사회의 전개에서는 일본의 획일적 집단적 문화보다 우리의 개성적 독창적 체질이 더 유리하고 그 점에서 기술과 사회적 기능에서는 일본보다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진(豫診)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정치는 여전히 개성과 독창을 거부하는 폭력에 의존하고 어느 일본 기자의 관찰대로 한국의 정치는 일본의 메이지(明治) 40년대에 있다면 일본보다 80년은 떨어진 셈이니 기가 찰 노릇이다. 해방 후 줄곧 속임과 폭력으로 일관된 나쁜 정치 아래에서도 우리의 산업 기술 예술 등 민간 부문의 활동이 선진국과 겨를 수 있게 발전한 다이나믹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국제환경 덕일까. 일당독재와 수용소 군도(群島)가 지배하는 체제, 인권과 시장을 무시하는 체제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했건 우연히 그리됐건 자유, 민주, 인권, 시장을 명분으로 하는 국제 체제 속에 있게 만든 여건이 지나간 날의 민간의 휴화산을 교육열 성취욕구의 활화산으로 변환시켰고 이 민간의 활화산이 국가 발전의 에너지였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어쩌면 우리의 제일의 상대인 북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정치도 나쁜 정치였지만 북한은 더욱 포악하고 공산권에서도 외면당할 정도의 기상천외한 왕조 정치로 해서 우리의 나쁜 정치로도 이 나라가 견딜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 전환기마다 독재의 연명을 가능케 한 것은 민간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김일성의 역설적 도움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정치의 창조적 주도적 발전에 의한 국가 발전 아닌 민간 활력과 국제 여건에 의한 발전은 정치로 하여금 남의 실적을 자기의 것인양 차용, 악용하는 선거 기술만 발전시켰다. 민간의 자생적 독창적 활력과 성취를 마치 정치 또는 정권의 치적인양 정치 선전화하는 데서 오는 낭비는 너무 컸다. 정치의 말을 믿었던 민간 부문은 오히려 실패했고 정치를 안 믿고 자주 독창으로 뚫고 간 부분은 성공한 것이 단적으로 이를 말한다.

이 나라에서 지나간 40년이 그랬듯이 현명한 정치, 슬기로운 치자(治者), 앞서가는 정치인이 있기를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앞이 보이는 장래까지는 나쁜 정치 아래에서도 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킬 방도를 오히려 민간 쪽에서 궁리해 가는 수밖에 없겠다. '다행히' 태평양시대의 국제환경을 개선돼 가고 있고 김일성의 포악한 정치가 계속되고 있으니까 나쁜 정채 아래서도 발전해온 '과거의 다이다믹스'가 유지될 듯도 하니 미래에도 이 외생적 역설적 조건에나 위안해야 한단 말인가.

'사랑하는 우리 정치', '좋은 정치가 주도하는 국가 발전'에의 기대를 포기하는 심정은 정말 슬프다. 그러나 아무리 슬퍼도 이 나라는 지켜야 하고 민간의 각계 지도자들이 숙명을 거부하고 나쁜 정치 아래에서도 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킬 신념으로 미래의 방도를 궁리해 가면 정치도 결국 따라오지 않겠는가.

기사 읽기: http://bit.ly/U0GX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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