聰明不如鈍筆
총명불여둔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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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여수→순천→마산→부산→수원→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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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떠나면서 특실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조미정 박사님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요즘 KTX 타고 출장 다니면서 생각한 게 돈 몇 천 원을 더 내고 일부러 특실 표를 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돈을 아끼려고 역방향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일반석을 끊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 돈 몇 천 원을 더 쓸 수 있는 여유, 그게 행복 아닐까요?
그냥 모처럼 혼자 떠나는 휴가에 그 '행복'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손으로 꼽을 만한 사람만 겨우 자리 잡은 수원발 여수행 새마을호 특실. 대신 빈 자리를 "5000원 짜리 행복"이 채웠다고 쓰면 너무 유치할까? 그래도 좋다. 난 이번 주 내내 서울에 가지 않아도 좋다.



수원역 플랫폼으로 내려가면서 필기구를 안 챙겼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명색이 기자라는 녀석이. 아, 명함도 빼먹었다. 이건 굳이 챙길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명함을 팔아' 먹고 사는 직업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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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5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내려가면서 정작 불편했던 건 노트북을 챙기지 않아서였다. '카페열차'에 들러 500원 짜리 동전이 생긴 기념으로 15분 동안 인터넷. 괜한 불편함과는 별개로 세상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강박.

인터넷을 하는데 옆에 마련된 노래방에서 한 사내가 신나게 미니 콘서트를 연다. 월요일 오후 5시 새마을호 열차 안에서 노래 연습을 해야 하는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자기 음역은 생각 않고 여가수 노래만 선곡하는 모습이 퍽 안타깝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곧잘 Maceo Paker를 "자살에서 나를 구한 음악"이라고 표현했다. 하루키를 읽으며 모처럼 'Homeboy'를 들으니 그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다음 곡은 강산에 '예럴랄라'. 기차는 신나게 달려가고 나는 살아 있다. 그 날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른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


여수역에 혁진이가 마중을 나왔다. 저녁은 조기매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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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를 정하고 나와 간단히 시내를 좀 걸었다. 중앙동은 수원 남문 분위기다. 학교를 마친 여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옷가게 사이를 분주하게 걸어다니는 느낌.

진남관 옆을 걸어가는데 혁진이가 퍽 길고 상세한 설명을 해준다. "너 국사 공부 되게 열심히 했구나." 이튿날 진남관 안에 들어가서도 혁진이가 해준 말들이 그대로 떠올랐다. "국내에서 가장 큰 단층 목조 건물", "담벼락을 만든답시고 멋대로 헐어낸 옛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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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으로 자리를 옮겨 맥주 스무 병 그리고 노래방. 여수 '명승지'라는 말을 듣고 가봤지만 노래방은 그냥 다 똑같은 노래방일 뿐.


15일엔 여수역에서 출발하는 '시티투어버스' 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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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예전에 부모님과 함께 왔을 때 가지 못했던 향일암. 하릴없이 돌아오는 길에 "바닷물을 그대로 떠서 끓인 것 같던" 해물탕을 먹었다. 창밖으로 그 집 간판이 보여 괜스레 들뜨는 마음. 그런데 이제 가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메모, 메모.

숙소로 돌아와 3대3까지 따라갔다가 결국 경기를 내준 히어로즈 경기 시청.


이렇게 여수는 끝나고 다음날 순천을 거쳐 마산행.

순천에서는 "한때 서로 반려자라고 착각했던" K와 점심으로 '보리밥 정식'. 상차림을 찍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 만났다면 그런 착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만 잠깐. (상차림을 찍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찍을 때 호들갑스런 모양새라고 해야 할까? 혹시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진심이라 미안.)

다시 버스를 세 시간 달려 마산 도착. 시외버스터미널 뒤편 모텔 가를 한참 걷다가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곳을 골라 들어갔는데 분명 주인 아들로 보이는 사내는 게임에 빠져 "잠깐 기다리세요"하는 소리만 반복.

방에 갔더니 컴퓨터가 없다. "컴퓨터 있는 방은 5000원 더 주셔야 해요." 바쁘게 움직이는 마우스. 겨우 컴퓨터를 켜고 앉아 '아, 역시 IE6은 미치도록 불편하구나'하는 생각 잠깐. 42인치 PDP가 걸려있다고 자랑했지만 딱 기본 채널뿐.


세교 형이랑 만나서 이모댁에 잠깐 들리고 횟집으로. 다시 세교형 약혼자(?)를 만나러 창원대 앞. 참 깨끗해 보이는 분이었다. 피부 맛사지를 막 끝내고 나오면 당연히 그래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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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창진에 온 김에 황욱 회장님께 안부 전화. 언제든 에너지가 넘치는 황 회장님. 횟집에서 황환택 부회장님께 전화가 와서 "올라가는 길에 부여도 들리겠다"고 호기롭게. 아, 나는 같은 성(姓)을 가진 분들한테 약한 건가?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부산서부터미널. 창호가 "형, 서면에 계세요. 8시면 끝나요." 지하철을 타려다 무릎이 좀 시큰거려서 택시. "아저씨, 서면이요." 라디오에선 '출구 전략'을 쓸 때가 됐는지에 대한 토론.

살짝 잠이 들었다 깨니 "다 왔습니다"하는 소리. 그러나 이곳은 부산역. "아저씨, 저 서면 가자고 그랬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해서…" "아니에요. 표도 예약해야 되니까 그냥 여기서 내릴게요."

3층에 올라가 도착역에 부여를 찾았지만 부여엔 기차역이 없었다. 1초쯤 망설였을까? 30분 뒤에 서울로 출발하는 KTX에 올라타고 귀가. 왜 언제든 여행을 갔다가 집에 오는 길은 늘 이렇게 충동적인 걸까? 물론 이번에도 특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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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해 도배를 새로한 방에서 자고 부여. 황 부회장님과 이수희 선생님께 과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역시 산삼은 몸에 좋다.


아, 내일 출근하기 싫어라. 그리고 내년부터 남은 휴가는 웬만하면 한 분이랑 쭉 떠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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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예럴랄라, Homeboy 그리고 Honey Honey를 들으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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